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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개론_중간고사 내용 정리_200520_R0교양 과목 족보 2020. 5. 20. 01:45
국제관계학개론 중간고사 범위의 내용 번역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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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 2 : WHAT IS INTERNATIONAL RELATIONS? 국제 관계란 무엇인가?
외교 정책은 A라는 나라의 국가의 목표와 B라는 나라를 향한 행동을 연구이다. 즉 그것은 B라는 나라의 상태를 향한 일방적 행동을 말한다, 우리는 ‘미국의 대중국 외교정책’ 또는 ‘러시아의 대 일본 외교정책’이라고 말한다.
Foreign policy
국제 정치(IP)는 ‘주건 사이에 정치적인 상호 작용’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태를 두 개 이상의 나라를 포함한다. 따라서 우리가 ‘동북아 국제 정치’를 말할 때 이는 미국, 러시아, 중국, 남북한, 일본 간의 정치적 상호 작용, 남북한 다룬다. 비유하자면 외교 정책은 ‘일방통행’인 반면 국제 정치는 ‘양방향 통행’이다. 국제 정치와 외교 정책은 모두 나라(또는 정부)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포함합니다.
International politics, one-way street, two-way street
국제 관계의 예로는 국제법, 국제 조직, 적십자, 국제 무역, 운송 및 통신 및 국제 관광이 있다. 국제 정치는 오직 정치적인 상호 작용만을 포함하지만 국제 관계는 정치적 작용 및 비정치 정치적인 상호 작용을 포함하고 있다.
International relations
국제 정치는 그들이 정부 간 관계에 영향을 제외하고 국제적인 상호 작용에 관심되지 않는다. "탁구 외교"는 중국 정부가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설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미국과 중국은 1949와 1971 사이의 모든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다. 1971년 초,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다. 이 탁구 경기는 정치적인 이유와 결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탁구 경기는 국제 정치에 속한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사이의 보통의 탁구 경기는 정치적 연결을 하지 않으므로 국제 관계에 속해 있어야 한다.
ping-pong diplomacy
이 예제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국제 관계와 국제 정치는 항상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국제 관계와 국제 정치는 종종 서로 혼용해서 사용된다. 세계 정치 역시 국제 정치 또는 국제 관계와 함께 사용된다.
지구 정치는 글로벌 이슈와 문제를 다루고, 세계를 50억 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마을로 본다. 그것은 평화와 전쟁이나 경제적 평등보다 삶의 질을 다룬다. 그것은 인구 증가, 항공 및 해양 오염, 자연 서식지, 오존층의 고갈과 같은 세계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Global politics
덧붙여서 우리는 다국적 관계와 지역 연구의 몇 가지를 더 이해해야 한다.
다국적 관계 (TR) [초국가적 관계]는 한명의 행위자가 정부 또는 정부 조직의 요원이 아닐 때 유/무형의 item 이 나라 경계에서 교환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상호작용이 비정부 행위자(개인이나 민간단체)를 포함하는 경우 우리는 ‘다국적[초국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초국가적 관계는 정부를 포함할 수 있지만, 비국가적 행위자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므로 정부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TR의 예로는 다국적 통신, 교통, 금융, 여행이 있다. Nye 와Koehane는 국제관계는 국가를 국제 시스템의 중심 행위자로 너무 많이 고려해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힘과 영향력의 ‘고위 정치’ 이며 국제 협력보다는 국제 분쟁을 고려하는데 ‘당구공 모델’을 따른다. 그들은 자연적인 국제 관계는 국제적이기 보다 초국가적이며, 그것은 많은 국제적 행위자와 여러 단계의 상호작용과 연계되어 있다. 또한 그들은 ‘당구공 모델’보다는 ‘거미줄 모델’이 더 국제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데 정확하다고 말한다.
Transnational relations, High Politics, Low Politics, billiard ball model, cobweb model
지역연구는 특정 나라나 지역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를 가진다. Alfred Meyer에 따르면 지역 연구는 ‘몇 가지 문화에 대한 지식이나 몇 가지 문화 그룹을 이해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며 지역 전문가는 스스로 지식을 결합하여 지리뿐만 아니라 역사, 경제, 사회구조, 문학, 민족적인 것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 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중국 전문가는 중국의 역사, 문화, 저이, 경제 그리고 언어를 다룬다. 이와 비슷하게 라틴 아메리카 전문가는 라틴 아메리카의 것들과 친해져야 한다. 1950년에서 60년대의 냉전 동안에는 소련 또는 중국에 대한 지역 전문가가 미국에서 많이 요구되었다. 그때는 미국의 정부나 많은 민간 재단이 지역 연구에 재정을 포함하여 강력한 지원하였는데 이것은 적을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냉전 후에는 아랍 전문가들의 수요가 증가하였는데 아랍 세계가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Area studies, Alfred Meyer
LESSON 3: ANARCHY OF THE INTERNATIONAL SYSTEM [국제체제의 무정부상태]
국제 정치에 관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무정부 상태이다. 여기서 아나키는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는 혼란 또는 무질서. 두 번째는 중앙정부의 부재를 의미한다. 보다 시피 아나키의 두 가지 정의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해야 되는 것은 국제 시스템에서 아나키의 뜻은 ‘중앙정부의 부재’ 라는 것이다.
anarchy, the absence of a central government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국제 정치는 아나키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국제 시스템에서는 상위의 정부가 없다는 것이다. 국내의 정치에서는 정부가 합법적으로 무력을 독점하지만 국제 정치에서는 무력의 독점적 행사는 없다.
따라서 무력은 각 나라로 퍼져 있으며 상위 정부의 규제가 없으므로 무력은 국가 간 분쟁의 궁극적인 수단이 된다.
domestic (or internal) politics, higher government, monopoly on the use of force
웨스턴 영화를 생각해보자. 법은 영향력도 없고 거의 무시된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권총을 가지고 다닌다. 가장 빠른 총잡이가 살아남는다. 유사하게 국제 정치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자구책이다. 다른 말로 모든 나라는 자국의 이익과 또 살아남기 위해서 자국의 자원에 의지한다. 불행하게도 나라는 나쁜 나라의 영토 침공 또는 온갖 만행이 있더라도 911을 부를 수 없다.
self help
법에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존재하고 그것은 국제법이라고 한다. 국제법은 그러나 강제성이 없는데 왜냐하면 국제 시스템은 ‘국제적인 치안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속도 제한을 할 수 있는 경찰력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속도 한계를 무시할 것이고 고속도로는 굉장히 위험해 질 것이다.
international law, international police force
표를 보면 중앙 정부의 부재는 국제 정치와 국내의 정치와 차이점을 만들게 되는데 권력 분배, 무력의 독점, 법집행, 공동체인식과 같은 면에서 차이를 가진다.
power distribution, the legitimate use of force, law making and law enforcement mechanisms, sense of community
덧붙여서, 국제 정치의 무정부 상태에 관해 기억해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무정부 상태는 혼돈이나 불안정과는 다르다. 세계 정치의 무정부 상태는 간단히 각 나라의 행동이나 태도를 규제할 상위 정부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무정부는 많은 제도로 완화 되는데 가령 국제법, 외교, 세력 균형 시스템 그리고 국제기구 같은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제도는 각 나라가 전쟁으로 가는 것을 방지한다. 이런 제도들은 단순히 무정부 상태를 완화하는 것이지 무정부 상태 자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the balance of power,
국제 시스템에서 “self-help” [자구] 라는 것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국제법을 집행할 국제 경찰력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제법에 걸리게 되는 가?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자구 와 다른 나라의 개입이다. 1990년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그것은 명백히 국제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쿠웨이트는 먼저 스스로 막아내려고 시도했으나 이라크의 군사력과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쿠웨이트는 미국에게 이라크의 침략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여러 나라들과 함께 쿠웨이트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쿠웨이트는 주권과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제 법을 지지하는 것은 자구책과 동맹국의 개입이라는 두 가지이다.
self-help, self-defense, Saddam Hussein, Kuwait
무정부 상태의 국제 시스템은 안보 딜레마를 가져온다. A라는 나라가 자국의 안보와 생존을 위해 국방과 군사시설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것은 잠재적인 적인 B라는 나라에 위협으로 인지된다. 그 결과 B 역시 A에 대항하여 군사시설을 증가시키게 된다. 결과 두 나라의 국가 안보를 위해 했던 노력들이 더 많은 위험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많은 보안이 결국 더 낮은 보안으로 이어진다는 역설이다.
security dilemma
왜 안전에 딜레마가 생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본질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한 평화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래에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제 시스템의 무정부(중앙 정부의 부재)상태가 보안의 딜레마를 이끈다. 자신이 와일드 웨스트의 마을에 있다고 상상하자. 법과 질서는 존재하지 않고, 악당은 주변에 있으며, 불법은 늘상 일어나고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여기에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누구나 권총을 가지고 다닌다. 당신은 안전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기억하라. 보안관이 죽거나 위험한 악당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 당신은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것인가? 만약 당신이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의도를 의심하고 두려워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이 모두 권총 두정씩 가지고 다닐 것을 결정한다. 그러면 당신은 아마 당신은 자동 소총을 들고 다닐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수류탄, 바주카, 탱크 와 같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군비 경쟁의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정확히 냉전에서 미국과 소련의 경우와 같다. 군비 경쟁은 쉽게 제어할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가게 되고 이것은 세계 핵전쟁과 같은 치명적인 상황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인간 문명의 종말을 가져온다.
처음에는 안전을 위해 군사력을 키우지만 군비경쟁은 전보다 당신이 덜 안전해 졌다고 느끼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어떻게든 안전함을 느끼려고 하는 행동들은 오직 불안전을 만든다. 그것이 우리가 딜레마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약 당신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있다면 아마 불안할 것이다. 만약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무정부 상태의 국제 시스템에 속한 모든 나라가 직면하는 딜레마이다.
arms race, insecurity
LESSON 5. THE STATE AND SOVEREIGNTY [국가와 주권]
앞서 우리는 국가 간의 정치적 상호 작용과 같은 국제 정치에 관해 정의하였다. 지금부터는 국가와 주권에 대해서 논의 할 것이다. 무엇이 국가인가? 국가와 민족은 어떻게 다른가?
국가는 하나의 제도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관계이며 가장 근본적인 질서 시스템이다. 근대의 국가는 영토적이다. 그들의 정부는 국민과 국경 내의 일을 조정한다.
institution, a system of order, territorial
네 가지 조건이 만족 돼야 국가가 존재한다. 국민, 영토, 정부, 주권.
I) 국민(a people) : 공동체 내에 살아 있는 남녀의 총계. 그들은 다른 인종, 신념, 색깔에 속해있다.
ii) 영토(territory) : 사람들이 정착해서 사는 땅. 유대 민족 이스라엘을 1948 년에 설립하기 전과 같이 방황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아니다.
iii) 정부(a government) : 영토의 법에 따라 법과 사람들을 대표하는 한명 또는 그이상의 사람들. 무정부 공동체는 국가가 아니다. 1970년대 초의 레바논, 1990년대의 소말리아는 영향력 있는 정부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가 아니다.
iv) 주권(sovereignty) : 주권은 다른 모든 권한에서 독립되어 있는 최고 권한이다
국가의 형태
국가는 여러 형태를 가진다. 권력과 이익 측면에서 국가는 (1) 전 세계적 강대국, (2) 지역적 강대국, (3) 국지 강대국으로 나뉜다.
global powers, regional powers, local powers
전 세계적 강대국은 세계와 그들을 보호하는 힘에 관심을 가진다. 1991년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초강대국이 있었고 미국은 여전히 세계적 강대국으로 남아 있다.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세계 각 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을 유지하고 있다.
A global power
전 세계적 초강대국은 인류를 즉시 멸망하게 할 수 있는 핵시설을 가진 나라이다.
global super power
주요 강대국은 일반적으로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쓰였으며 국제 정치에서 유럽 또는 북 아메리카와 같은 주요한 국제 정치의 대상으로 언급되었다.
major power
지역강대국의 관심과 권력은 나라와 포함하고 있는 지역에 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중국과 같은 유형의 나라가 모두 포함된다.
regional power
국지 강대국의 관심과 권력은 나라와 그와 근접한 지역에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여기에 속하며 남한, 싱가포르, 베트남, 니카라과 가 이 유형에 해당된다.
local power
국가는 또한 영토의 크기, 인구, 경제력, 군사력으로 분류될 수 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영토가 세계의 땅의 1/8을 차지하고 있다.(러시아에는 서로 다른 시간대가 7개가 존재한다). 반대로 ‘난쟁이’ 국가는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산마리노와 같으며 도시의 크기의 영토를 가진다. 싱가포르는 더 이상 도시국가가 아니다. 인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 가장 큰 나라(14억 명)이고 세계 인구의 1/4가 중국에 있다. 남태평양의 나라 중에 누우루어는 6천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일인당 연간 소득이 2만 불을 넘으며, 높은 수준의 소득 평등, 높은 교육 인구율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중앙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가난과 낮은 수준의 삶 그리고 낮은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다.
dwarf states, city state
민족은 역사, 문화, 인종, 종교 언어와 같은 일반적인 것들을 공유하는 그룹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는 종종 혼용해서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UN은 185개가 넘는 국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직도 이것을 United Nations라고 부른다.
The Nation, United Nations
왜 우리는 무정부 상태의 국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까? 왜 우리는 안보 딜레마를 가지고 있을까? 국가 주권이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 키 이다. 국가 주권이 무정부 형태와 안보딜레마를 일으킨다. 그럼 주권이란 무엇인가?
주권은 한 영토 내의 최고 입법 및 법 집행 권한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현대의 주권에 대한 개념은 영토 국가의 출현과 함께 16 세기 후반에 정립되었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1648) 최고의 권력으로 주권은 특정 영토의 이상의 정치적 사실, 황제와 교황의 보편적인 권한 이상의 영토적 군주의 승리를 상징, 또 특정 봉건 귀족의 목적 이상이었다.
군주는 주권이 되었다. 그는 실정법의 기초가 되었지만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는 법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신성법과 자연법 아래 있었다.
Sovereignty, supreme law-making and law-enforcing authority within a territory, territorial state, Thirty Years' War, territorial princes, universal authority, man-made law(positive law), the divine law, natural law
주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독립과 평등이다. 독립이란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외부와의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립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즉 다른 나라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되었고,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되었다고 말한다.
independence, equality
국가평등은 자연주의 사상가들이 만든 국제 법에 소개되어 있다. 이유는 국가는 여전히 자연 상태에 있으며, 국가는 다른 국가와 반드시 평등 때문이다. 국가는 실제로 평등한가? 미국이 니카라과와 평등한가? 중국과 나우루어와 평등한가? 일본이 캄보디아와 평등한가? 정답은 No다. 사실 앞의 국가들은 군사력, 경제력, 정치영향력 등의 관점에서 평등하지 않다.
The notion of state equality
국가 평등이란 무슨 뜻일까? 국가 평등이란 법률적인 의미에서 평등하다는 뜻이다. 국가의 법률 평등성은 다음과 같다. (a) 문제가 발생하면 동의에 의해 해결 되어야 하고, 모든 국가는 투표권을 가진다. (b) 약한 국가의 투표도 강력한 무게를 가진다. (c) 어떤 다른 국가도 관할권을 주장할 수 없다. (d)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의 다양한 행위에 질문하지 않는데 이것은 후자의 관할권 내에서 적용하기 위함이다. 짧게 말해 국가 평등의 기본의미는 합의에 따라 결정에 도달하는 ‘한 국가, 한 투표’ 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평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가는 이론적으로 평등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만장일치를 필요로 한다. 왜 만장일치인가? 왜냐하면 국가는 주권을 가지고 (최고법 제작과 법률 집행의 권한), 자체의 동의 없이는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vote, jurisdiction, courts, one state, one vote
유엔총회에서 모든 국가들은 하나의 투표권과 같은 투표 무게를 가진다. 그래서 미국도 작은 나라인 온두라스도 하나의 투표권을 가진다. 유엔 헌장은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 아닌 나라의 국가의 주권을 없앴다. 동등하지 않는 대표와 국제기구의 주요 결정(US 안보리와 같은)은 국가의 주권과 호환되지 않는다.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Security Council
LESSON 6. THREE LEVELS OF ANALYSIS [3개의 분석수준]
다양한 분석 수준은 우리에게 국제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전쟁의 원인을 ‘체제수준, 국가수준, 개인수준’의 세 가지 분석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국제체제의 속성이 전쟁을 유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체제수준 분석). 우리는 국가의 기여가 전쟁을 유발한다고 할 수 있다(국가수준 분석). 또는 우리는 정치적 지도자의 개성이 전쟁을 유발한다고 할 수 있다(개인수준 분석)
● 체제수준 분석은 국가 행위자들에 의한 국제체제의 영향을 강조한다. 체제수준 이론은 비교적 긴 기간동안의 국제 정치체계의 주요 측면을 서술하는 아주 포괄적인 접근이다. 그것은 국제정치체제의 구성요소간, 그리고 국제체제와 그 환경간의 모든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체제는 환경 내에 존재하고 상호관계된 상호작용 간의 부분을 구성한다. 체제는 구조와 지속 또는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국제정치체제에서, 구조는 힘의 분배를 의미하고 절차는 그것들의 집단 간의 상호작용의 패턴 혹은 유형을 의미한다. 국제체제의 구조는 일극체제(하나의 강국이 지배), 양극체제(두개의 강국이 지배), 다극체제(몇몇의 강국이 지배)를 포함한다.
절차(또는 상호작용의 패턴)는 협력 또는 갈등을 포함한다. 국제체제의 절차는 (1) 그것의 권력구조, (2) 국가가 협력 시의 이득과 능력(예: 경제적 상호의존과 국제기고), (3) 국가의 목표와 수단(예: 혁명적이거나 현재상황의 목적).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구조(일극체제, 양극체제, 다극체제)는 절차(또는 협력과 갈등에 대한 상태의 행동)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앞의 내용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냉전체제 이후의 시대에, 우리는 현재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인 일극체제(정치적, 군사적 면에서)에 살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다른 주요 강국들(특히 프랑스, 러시아, 독일, 중국)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3년 3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부시는 다른 나라들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전쟁과 이라크 정복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일국체제 또는 국제체제에서의 미국의 우세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의 행동(이라크 침공)은 힘의 우세에 의해 결정되고 규정되었다.
냉전기간 동안에는 국제지배구조가 양극체제였다.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인 능력이 거의 같은 두 초강대국이었다. 그때는 세계가 두 진영으로(미국지지, 소련지지) 나누어져 있었고 대부분의 국가들은 어느 한 편에 서 있었다. 양극구조에서,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착수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소련과의 핵전쟁 전면전을 쉽게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체제는 몇몇의 주요 강국들이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양극체제였고, 하나의 강국이 그 체제를 유지하지 않았다. 이러한 다극체제 구조는 또한 국가들의 행동을 제한했다.
대부분의 체제는 몇 가지 기본 규칙이 있다. 국가는 이러한 규칙들과 관습들에 도전하거나 수용할 수 있다. 국제체제는 주요국가들의 목적에 의존하는 안정적 혹은 혁명적인 절차를 가지고 있다.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에 국민주권이라는 혁명적 의식을 전파했고 나폴레옹 전쟁은 세력균형과 게임의 규칙들 모두에 대한 거대한 도전의 형태를 취했다. 프랑스 혁명은 전쟁의 사회조직을 바꿨고 징병제(용병의 반대)를 초래했다. 시민들을 모국으로 불러 들였다. 전쟁은 더 이상 먼곳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몇천명의 용병들 간의 일이 아니라, 전쟁은 이제 모든 사람에게 관여했다. 그 의미에서의 변화는 국가가 또한 18세기 국제체제의 절차를 변화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을 가능케 했다.
1917년, 볼셰비키파가 러시아의 권력이 되었을 때, 그들은 국가연대 외교의 모든 체제를 부르주아의 허튼소리라고 간주했다. 그들은 혁명은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을 결속시키고 국경을 폐지하는 것이 혁명이고 그 다국적 노동자계급의 연대가 국가연대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레온 트로츠키가 러시아 외무장관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그는 그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선언을 공표하는 것이고, “close up the joint(연대를 폐쇄하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그들 스스로에서 국가연대체제의 부분을 발견했도, 그 것이 그들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1922년, 소련은 독일과 라팔로 조약을 채결했다. 그것은 추방국(버림받은 국가)들의 동맹이었다. 그리고 1939년 스탈린은 (히틀러를 서방으로 돌리기 위해)그의 이데올로기적 최대의 적인 히틀러와 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의 행동은 국제체제에서의 다른 행동들과 비슷하게 되었다.
국제체제의 구조는 국가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일극체제는 국가들이 패권국에 대항해 균형을 이루며 그들의 자주성을 보호하거나 또는 떠오르는 국가(신흥국)가 결국 지도자에게 도전을 하는 형태로 서서히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양극체제의 경우, 국가들은 세력균형을 위해 동맹을 이룰 것이지만 동맹은 유동적이다(유연하다). 전쟁이 발생할 수도 이으나,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유한할 것이다. 양극체제에서 동맹은 더욱 경직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계전쟁과 같은 커다란 분쟁의 가능성에 기여한다.(예: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들의 동맹을 굳게 쥐고 있을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 1914년 이전, 다극체제 유럽의 세력균형은 서서히 두 개의 유연성을 잃은 강한 동맹으로 통합되었다)
● 국가수준 분석은 국가 또는 국가의 외부 정책에 영향을 주는 사회의 국제적인 환경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사회의 본질(민주사회 혹은 독재사회), 공공의 의견, 국가적 이데올로기(공산주의적 혹은 파시스트적 이념들), 경제적 필요성(석유 수입)과 같은 국내적인 요인은 불가피하게 국가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몇몇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국가들은 독재정권 국가들보다 더욱 평화로운 경향이 있고, 만약 모든 나라들이 민주적이라면 전쟁이 적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전쟁을 유발한다고 믿고, 국가들이 공산국가 될 때 전쟁은 사라질 것 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을 연기한 것에 대한 주요한 이유는 공공의 의견이 전쟁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1930년대에 영토 확장을 결정한 것은 에너지와 시장과 같은 경제적인 요구들을 안정화하기 위함이었다.
● 개인수준 분석은 개개인의 핵심 권력자들의 의사결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개개인의 의사결정자가 그들의 국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을 예상했다. 전통적인 접근법은 이러한 분석법에 속하는 외교적 사학자들에 의해 사용된다. 개인수준분석의 연구는 의사결정자들의 이념, 동기, 이상, 지각, 가치, 특성에 집중한다. 정치적 지도자들은 분명히 대외 정책 결정들과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 스탈린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둘 다 소련의 지도자였지만, 가치, 이념, 태도 면에서 폭넓은 차이를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말 소련이 붕괴되는 것을 허가하였으나 스탈린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전혀 하락하지 않았다. 부시는 2003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지미 카터는 다르게 행동했다. 위에서 보듯이, 정치적 지도자들은 때때로 국가의 대외 정책 결정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세 개의 수준분석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정치적 지도자들의 부정함이 모든 전쟁의 이유라는 주장(개인수준 분석)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전쟁의 원인을 더욱 잘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국가수준 분석과 체제수준 분석과 같은 다른 요소들 또한 고려해야한다.
LESSON 7. ACTORS [행위자]
국제 정치의 행위자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 가보자. 비유를 이용하자면, 농구는 각 팀에 다섯 명의 선수(행위자)가 있고 이러한 선수들(행위자들)은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하고 그들의 상호작용들이 게임의 결과를 결정한다. 국제정치에서 게임의 선수들은 누구인가? 대략적으로 말하면 국제정치의 행위자들은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국가행위자와 비국가행위자.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국가행위자가 누구이고 비국가행위자가 누구인지 논의해보자.
● 국가행위자
국제 정치에서 주요 행위자는 국가행위자이다. 또한 국가는 (1) 다민족국가(또는 다민족제국), (2) 민족국가, (3) 분할민족국가 라는 국가적 구성유소들로 구별 지을 수 있다.
‥ 다민족국가에서, 하나 이상의 국가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20세기 초까지는 다민족국가(대부분 다민족제국의 형태)는 국제정치에서 주요 국가행위자였다. 러시아 전제정치(제정)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영국 제국이 이러한 예에 포함된다. 러시아 전제정치 제국의 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제국은 Russians, Ukrainians, Belurussian, Georgians, Tatars, Uzbeks, Kazaks 등 100개 이상의 민족 집단을 포함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스위스, 벨기에, 러시아가 다민족국가에 해당된다.
‥ 만약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민족국가라고 부른다. 민족국가는 하나의 두드러진 민족 집단을 구성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 폴란드가 민족국가의 예이다. 민족국가는 20세기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들로서 다민족제국을 대체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민족국가가 가장 이상적이다.
여기에는 민족국가의 구성에 다다르는 두 가지 다른 길이 있다. 유럽에서는 민족주의가 점차적으로 국가의 창조를 앞서고 있다. 러시아 전제정치(제정)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같은 다민족국가 내의 소수 민족이 처음엔 민족주의 사상을 발전시켰고 그 다음에는 민족적 독립을 얻어내 민족국가들을 형성하였다. 만족자결주의의 원칙은 이러한 경향을 강화했다. 1차세계대전 발발만 가지고, 자결주의원칙은 어떠한 효과적인 진척을 이루었다. 1918년 1월8일 미국 회의에서 발의된 윌슨의 정의로운 평화의 14조항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포함한다. 1차세계대전 동안, 민족자결주의원칙은 널리 퍼졌고 다민족제국(러시아 전제정치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은 몰락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들은 유럽에서 독립을 획득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아랍인과 같은 터키민족이 아닌 민족을 포함하는 오스만제국(또는 터키제국)이 있다. 여러 해 동안 터키의 법아래서 살았던 이러한 민족들은 민족주의를 발전시켰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후에 그들 고유의 국가를 형성하였다. 민족주의와 민족의식은 이러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것보다 앞서 존재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유럽에서는 민족주의와 민족의식은 새로운 국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비유럽 세계에서는 국가 형성 절차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났다. 비유럽의 맥락에서 국가의 창조는 민족주의 또는 민족의식의 발전 이전에 일어났다. 19세기 서구 제국들이 국가를 형성할 때,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민족, 언어 종교를 고려하지 않는 채 국경선이 그려지는 방식으로 국가를 형성하였다. 제3세계의 새로운 국가들은 때때로 인조적이고 식민지적 형성이었다. 많은 이러한 국가들은 강한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 식민지 (통치) 강국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은 많은 민족집단을 포함했다. 이러한 국가들은 통치 집단 또는 식민이후 국가들에 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부분에 대한의식이 약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유산의 결과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여전히 건국(민족주의)와 투쟁하고 있다. 르완다가 좋은 예이다.
‥ 분할민족국가에서, 하나의 민족은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되어 국가를 형성한다. 한국, 중국, 독일이 이 카테고리 아래 속한다. 두 한국인 국가들은 여전히 한반도에 공존하고 있다. 중국과 타이완은 둘 다 중국민족 국가이고 그들의 통일은 여전히 핫 이슈로 남아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또한 분할민족국가의 예이다.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은 같은 언어와 문화적 유한을 가진 같은 민족집단이다.
● 비국가행위자
비국가행위자는 세 가지의 유형이다. (1) 운동 (또는 영토의 비국가행위자 (2) 국제적정부간조직, (3) 국제적비정부간조직
운동 :
민족해방운동과 분리주의운동이 운동의 예이다. 그들은 국가를 성립하는 것을 열망하기때문에 또한 영토의 비국가행위자라고 불린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국제적 해방운동이고 아직 많은 정부들과 외교적 관계를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의 관찰자와 지위를 누리고 군사적 힘을 인정받고 있다. 비록 PLO가 국가는 아니지만, 이것은 국제정치의 행위자이다. 분리론자 단체들은 국가(연맹)에서 탈퇴하여 분리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영국에서 북아일랜드를 분리하여 아일랜드와 통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체첸 족은 러시아에서 분리독립 하고 그들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무장투쟁을 하고 있다. 캐나자의 주 퀘벡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캐나다로부터 분리독립하고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동 터키의에 거주하는 쿠르드족, 북동 이라크, 북동 이란, 북동 시리아와 아르메니아의 작은 구역들 또한 분리동립하고 독립국가를 형성 하는 것을 열망한다.
영토회복주의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다. 알바니아는 코소보를 되찾는 것은 추구하고 로마니아는 몰도바와 통합하는 것을 원한다.
국제적정부간조직(IGOs) :
NATO, UN, EU(유럽연합)과 같은 IGO들 또한 국제정치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한다. 그들의 구성원들은 국가의 정부들이다. IGO들은 때때로 국제정치에서 독립적인 행위자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들은 하나의 외부 관세와 많은 협상 시기를 하나의 정치 행위자로 가진다. 대부분의 IGO들은 그들의 구성원들의 관심사를 반영하지만, 때때로 그것은 유럽의 공동체 정책, 유럽연합의 발언 또는 NATO의 반응으로 의미가 통한다.
국제적비정부간조직(NGOs, INGOs)
NGO는 사적인(비정부) 단체이고 그들의 회원들은 사적인 단체와 개개인들로 이루어져있다. NGO에는 두가지 타입이 있다 : (1) 영리추구 NGO, (2) 비영리추구 NGO
영리추구 NGO
다국적기업(MNC)는 영리추구 NGO에 속한다. 다국적기업은 이익을 만들고 시장을 확대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국제정치의 행위자로서의 다국적기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보자. 그들의 물리적, 재정적 권리행사의 규모에 의해서 다국적기업은 당대의 국제 체제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IBM, GM, 브리티시 페트롤륨,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다국적기업의 권리는 작은 국가의 경제적 능력은 넘어선다. 그들의 거대한 권리(물리적, 재정적)를 이용하여 대규모 다국적 기업(IBM, GM, 마이크로소프트)들은 국제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실, 다국적기업은 때때로 주인 국가의 국내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과테말라에서의 United Fruit Company의 활동은 이러한 점에서 좋은 예이다. 1952년 새 정부가 아르벤스를 과테말라의 권력으로 이끌었고 기업의 경제적 이익에 적대적인 정책을 추구했을 때, UFC와 미국 정부는 아르벤스 정권의 타도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IIT 회사는 1970년대 초 칠레의 사회주의 지향적인 알렌데 정부를 실각시키는데 미국정부를 도왔다.
비영리 NGO
국제 적십자, 녹색 운동, Amnest International, 로마 가톨릭교회는 비영리NGO의 예이다. 가톨릭교회는 바티칸시의 수장이고 그들은 사실상 세계 모든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황은 경제발전, 무기 통제, 정치정 정권의 본질 등 다양한 국제 문제들에 대해 연설을 한다. 이러한 연설이 외국의 정책결정자들의 관점의 영향을 주는 정도에서, 그 영향은 직접적이다. 국제지뢰금지운동은 비인간적인 모든 지뢰를 금지하는 오타와섬 협약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반적인 비정부행위자는 국제정치에서 몇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 : (1) 그들은 국제외교의제에 어떠한 문제를 제기한다, (2) 그들은 어떠한 세계적 지역적 문제들에 관해 널리 알리거나 시민들의 의식을 일으킨다, (3) 그들의 대의명분이 상응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국제 정부와 국제 단체에 압력을 행사한다, (4) 그들은 즉각적인 행동을 통한 결과를 추구하고 때때로 무력사용이나 위협을 수반한다.
누가 국제정치에서 더욱 중요한 행위자인가? 국가행위자 아니면 비국가행위자 인가. 국제정치에서 국가행위자가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남아있다. 비국가행위자는 국제정치에 영향을 주지만, 이러한 영향은 정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국가행위자는 1차 행위자이고 비국가 행위자는 2차 행위자이다.
국가가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남은 이유는 (1) 그들은 국토 수호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충성을 통솔한다 (2) 그들은 궁극적인 위협(또는 전쟁)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 (3) 정부는 국민들에게 모든 범주의 복지와 안보에 영향을 받는다 (4) 정부는 통치권(자주권)을 누린다. 모든 다른 종류의 행위자는정부의 동의가 있어야 존재하고 운용된다.
LESSON 9. THEORERICAL APPROACHES [이론적 접근방법]
사회과학자와 사학자들은 그들의 분석에 다른 접근법을 가진다. 사학자들은 주로 특정 사실이나 상세사항에 관심을 가진다. 사회과학자들은 행동의 규칙적인 행동 패턴의 발견과 변수들로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 것을 추구한다. 전쟁의 원인과 본질에 대한 설명에서, 예를 들어 국제정치 과학자들은 군비지출수준의 관계와 전쟁발발의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한다. 군비 지출(독립변수)의 증가가 전쟁 발생 가능성(종속변수)을 증가시켰나? 국제정치 과학자들은 이러한 타입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물리와 같은 자연과학에서는 변수들 간의 관계가 명확하고 변수들 간의 관계에 대해 묘사, 설명, 예측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100℃(독립변수)가 되면 물(종속변수)이 끓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가능하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는 변수들 간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관여하고 그것들은 항상 예측 불가능한 인간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미국-캐나다 관계에서 높은 군비지출의 영향은 미국-캐나다 관계와 차이가 있다)
사회과학의 대부분의 이론들은 분석의 틀 단계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Holsti은 분석의 틀을 정리도구 또는 조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접근방법으로 정의했고 학생들은 국제관계에서의 방대한 데이터와 사건들의 다양성을 통해 이해했다. (Holsti의 국제체제, 정부의 목적,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방어하는데 도입된 수단, 국가 간의 분쟁과 협력에서 보여지는 상호작용 유형과 형태를 포함하는 정리 도구)
분석의 틀은 정리도구, 모델, 이론들과 교체할 수 있게 사용된다. 분석의 틀은 지적인 프리즘과 유사하다. 당신이 사용하기위해 선택한 분석의 틀에 의존해서 당신의 관점은 국제정치의 어떤 특정한 측면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분석의 틀은 선글라스 한 쌍과도 같다. 만약 당신이 파란 선글라스를 쓴다면 당신의 시야는 파랗게 물들 것이다. 만약 당신이 갈색 선글라스를 쓴다면 당신의 시야는 갈색으로 물들 것이다.
과학적 이론 대 전통적인 이론
국제관계에서 과학지향적인 철학자(또는 행태주의자)는 현상을 묘사, 설명, 예측가능한 자연과학 이론들의 유형과 같은 과학적 이론을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개념, 통찰, 해결방법을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생물학, 통신처럼 다른 규율에서 빌려 온다. 그들은 또한 엄격한 연구 방법론(수학적 식, 통계학적 방식 등)에서 차용하고 조사에 계량화를 도입한다. 그들은 경험적인 관찰, 통계적인 기술, 그리고 그들의 이록적 접근의 논리를 강조한다. 그들은 국제관계에서 예측가능한 이론들의 달성을 목표로 한다. 국제관계에서 예측가능한 이론들은 아직 달성되지 못했다. 사실, 그 전망은 예측불가능한 인간행동의 본성과 국제관계 결과에 영향을 주는 무한한 변수들 때문에 그리 밝지 않다.
이와 반대로, “전통주의자들”은 과학이 추구하는것과 반대인 “지혜로운 관점”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하고 이것의 주요 연구주제는 외교 역사이다. 전통주의자들은 현상들의 질적인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행태주의자들의 정량적 방법에 과다한 강박에 대립된다. 전통주의자들은 역사의 모든 사건가 상황들은 분리된 독특한 현상이고 과학자들의 방식이 항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추상개념을 주장한다. 그들의 방법론은 대단히 역사적이고 묘사적이고 그들의 지향점은 경험적이기 보다 규범적이다.
국제관계의 학문은 이 두 개의 사상 군(행태주의자와 전통주의자)으로 나뉜다. 그들간의 끝임없는 논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현실주의 대 자유주의(이상주의)
일찍이 우리는 국제관계에서의 분석의 틀 또는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국제정치의 다양한 이론들 사이에서 우리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춰보자.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에 의해 특정지어진다. 첫째, 정치적 현실주의자는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관점을 가진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사악함, 죄스러움, 힘을 추구, 불안전한 존재라고 보여진다. 세계는 인류의 본성의 힘의 결과이다. 세계 체제가 사람의 노력으로 바뀌지 않았을 때, 사람은 이러한 세계 체제의 힘에 대한항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했을 것이다. 국가는 완벽한 선 보다 약간의 악을 추구해야만 한다. 둘째, 현실주의는 권력이 국제정치에서 중대한 결정요소라고 가정한다. 현실주의자는 권력의 본성과 요소에 주목한다. 중앙 정부의 부재와 권력의 구속에서, 현실주의자들은 세력균형체제를 통해 평화와 안정을 보전하는 것을 추구한다. 셋째, 현실주의자는 국가가 국제관계에서 주요 행위자가 되는 것을 고려하고 이러한 국가에 주목한다. 다국적기업과 초국가적 조직들과 같은 비국가행위자 덜 중요하다. 현실주의자들에게, 연구의 초점은 국가와 국가 간(또는 국제) 관계이다. 넷째, 국가는 합리적으로 행동해야한다. 이것은 의견 결정자가 주어진 목적 달성을 위해 최고의 가능한 결정을 하도록 노력한다고 가정한다. 다섯째, 군사적 정치적 문제는 의도를 지배한다. 국가는 그들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행동하고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권력을 사용한다.
자유주의는 철학자들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의 목적에서는 그것은 이상주의, 공상적 이상주의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첫째, 자유주의는 인간에 대해 낙관적인 관점을 가진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변할수 있으며 교육, 개혁, 그리고 이따금씩 무력사용이 사람을 성취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국제체제는 국제조직과 국제법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둘째, 자유주의는 국제평화는 세계 공공의견과 국제조직에 의해 규범화된 국제이익의 자연스러운 조화에 의해 보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자유주의는 도덕적, 합법적 어조이고 18세기 낙천적 계몽주의, 19세기 자유주의, 20세기 윌슨식 이상주의에 지적으로 은혜를 입었다. 넷째, 그들은 도덕적 기준이 국가의 외교정책의 행실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자유주위의 학설들은 현재 국제체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격렬하게 변화함을 옹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것은 현재의 국제체제 밖에서 최선책을 추구하는 현실적 학설들과 상반된다.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자유주의)
사실주의
자유주의(또는 이상주의, 공상적 이상주의)
유행했던 시기
1940년대~1960년대 중반
전쟁 시대 ; 1960년대 후반~1970년대
근간
18, 19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세력균형의 시대
18세기 계몽주의 ; 19세기 자유주의 ;
20세이 윌슨식 이상주의
인간성에 대한 시각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 ; 악
힘의 추구 ; 선천적으로 선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음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 ;
개선 할 수 있고 심지어 완전 할 수 있음
국제체제에 관한 시각
국제체제가 몇몇 불변하는 많은 요소들을 함유(지형, 인간본성 등)
세계은 인간 본성의 결과
민족국가체제를 국제법과 국제조직을 통해 변형할 수 있음 ; 세계는 교율, 개혁, 산발적인 무력사용
국제정치의행위자
국가행위자
비국가행위자
국제정치에 대한 접근방법
국가권력과 국가이익을 강조 ; 국제정치를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간주 ; 권력은 최후의 중재인과 같음 ; 국제이익의 충돌
도덕적-법률적 접근 ; 도덕적 기준의 현실화 ; 국제 이익의 조화
평화를 이루기 위한 최선의 수단
세력균형
국제 법 ; 국제 조직 ; 세계 정부
현실주의 전통에 속하는 저자들
이제 중요 작가들을 통해 국제관계의 현실주의적 전통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자.
투키디데스 Thucydides (author of The Pelloponnesian War, 431 B.C.)
투키디데스는 평소 국제관계 분야 건립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The Pelloponnesian War(필로폰네소스전쟁)은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위한 투쟁에 관한 학문이다.
아래는 책의 발췌이다.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아테네 권력의 성장과 이것이 스파르타에 야기한 두려움이었다.”
“비록 공포가 전쟁을 야기 했을지라도 권력과 상대적인 능력이 결과를 초래하였다.”
“... 강국은 권력 취하기 위해 행동하고 약소국은 그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수용한다.”
“... 만약 안전을 위해 한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쫓는다면, 이에 반대 정의와 명예의 길은 위험한 방향으로 연루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author of The Prince, 1513)
마키아벨리는 그의 시대의 정치적 관례들을 토대로 16세기 정치적 학설을 발전시켰다. 그의 학설은 현대 국제관계에서의 정치적 현실주의 이론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권력은 마키아벨리의 주요 고려대상 이었다. 그는 정치의 전투적 본성을 가정했고 인간본성의 비관적 시각을 정립했다. 마키아벨리에 있어서 국가의 생존(지배 군주와 동일시)은 최고의 군주였다. 국가의 안보는 군주가 다른 개개인을 무시한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 할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통치자는 가능하다면 선해야 하나, 필요하다면 기꺼이 사악한 (통치자의 신념과 일치하는)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
The Prince의 발췌
“모든 행동에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한 당연히 파멸할 수 있다.”
“사람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시치미Ep고, 위험에서 도망치려 불안에 떨고, 탐욕스럽다.”
“신중함은 위험의 정도를 판별하는 법과 최선으로 가장 적은 위험을 택하는 법을 아는 것에 달려있다.”
토마스 홉스 Tomas Hobbes (author of The Leviathan, 1660 )
홉스는 마키아벨리처럼 권력이 사람의 행동에 중대하다고 보았다.
The Leviathan의 발췌 내용
사람은 “결국 죽음을 부르는 권력일지라도 끊임없고 끝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다.”
“자연 상태”에서 세계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항하는” 전쟁의 상태가 된다.
강한 군주 없이는 혼돈과 폭력이 따른다.
그의 권력을 지배하고 분쟁을 예방하는 강력한 체제에 대한 강조에서, 그는 세력균형체제보다 세계 정부 또는 제계 제국을 제안한다. 홉스는 세력균형체제를 자연적 무정부 상태라고 간주했다.
한스 모르겐타우 Hans J. Morgenthau (author of Politics Among Nations, 1949)
2차세계대전 이후, 모르겐타우는 현실주의를 체계적 이론으로 구체화함으로서 현실주의적 입장을 강화했다. 그의 현실주의 학설의 뼈대는 18,19세기의 유럽의 전형적인 세력균형 시대에서 나왔다. 모르겐타우는 인간의 본성에 비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사악, 부정, 힘의 추구, 완벽하지 않음을 타고났다고 보았다. 세계는 인간의 타고난 권력의 결과이다. 비정부상태는 “완벽한 선보다 최소한의 악”을 추구한다. 세계 체제에서 모르겐타우는 “세력균형”(예: 단일국가의 패권을 유지함으로서)을 이용하여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모르겐타우는 국가이익을 국제정치의 “마지막 약속”이고 국가의 외교정책을 위한 “완벽한 표준”으로 간주했다. 정치적 행동이 국가의 국제이익에 기여하는 한, 최상의 국가 도덕원칙이 생존일 때 까지 도덕은 숙고될 것이다.
모르겐타우의 관점에서 국내와 국제 정치는 3개의 기본적인 유형으로 한정될 수 있다 : 정치적 정책은 권력유지, 권력강화 또는 권력과시를 추구한다. 국가는 현재상황을 규지하거나, 제국적 확장을 달성거나 또는 국위를 얻기 위해 고안된 정책을 따른다.
LESSON10. THE BALANCE OF POWER SYSTEM, 1648-1914 (1/2) 세력균형체제
Readings: Mingst, 25-34.
Beginning with this lesson, we will deal with historical international systems.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역사적인 국제체제를 다룰것이다.
Historically, major powers (강대국) have sought to maintain peace and stability on the international scene by utilizing one of the following three peace systems: the balance of power system (세력균형체제); the collective security system (집단안보체제); and the balance of terror system (공포균형체제).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은 다음 3개의 평화 체제들 중의 1개를 이용하는 것에 의해 평화와 안정성의 국제적인 장소로 생활을 유지하려고 했다.
세력균형체제, 집단안보체제, 공포균형체제
In this section of the course we will look into the three peace systems.
이 섹션 안에서 우리들은 3대의 평화 체제들을 알아 볼 것이다.
Lessons 10 and 11 will examine the balance of power system that controlled and regulated inter-state relations of the modern states system (현재국가체제) from 1648 to 1914.
10, 11장은 1648 에서 1914까지 (현재국가체제)의 관계들을 제어하고, 통제했던 세력 균형 체제에 관해 조사할 것이다.
The Treaty of Westphalia (웨스트팔리아 조약) (1648) was a watershed in international relations history because it laid the ground rules for inter-state interactions such as state sovereignty (국가주권), diplomatic intercourse (외교교류), and the balance of power.
(웨스트팔리아 조약) (1648) 은 (국가주권), (외교교류) 그리고 세력 균형과 같은 국가간의 룰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국제 관계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The balance of power system, which was reconfirmed in the Treaty of Utrecht (유트레히트 조약)(1713), was the key to peace and stability in Europe during this period.
세력 균형 체제는, 이 기간 동안 유럽의 평화와 안정성의 핵심임을 (유트레히트 조약)(1713) 에서 재확인했다.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ideas of nationalism and people's sovereignty associated with it posed a serious challenge to the dynastic state system (왕조국가체제) (as well as to peace and stability) and eventually replaced it with a nation-states system.
프랑스 혁명과 민족주의의 생각,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국민의 통치권은 (왕조국가체제)에 도전하였고, 결국 국민-국가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Lesson Objectives
After completing this lesson, you will be able to
* understand the significance of the Treaty of Westphalia (1648) and the Treaty of Utrecht (1713); 두 조약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 recognize the "rules of the game" in international politics from the fiftee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rules which revolved around the notions of state sovereignty and balance of power; 15~19세기 세력 균형과 국가 주권의 관점을 생각해보고
* become familiar with the impact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upon the creation of nation-states system
국민-국가 체제의 창조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향에 정통하고 있게 될 것.
LECTURE NOTES
A. The Treaty of Westphalia and the Emergence of the Modern States System.
웨스트팔리아 조약과 근대 국가 체제의 출현
The modern states system in Europe emerged from the Treaty of Westphalia (1648), which terminated the Thirty Years' War (30년전쟁).
유럽의 근대 국가 체제는 30년전쟁이 끝난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부터 출현하였다.
It was a totally new international system, different, in many important ways, from the preceding feudal system.
그것은 이전의 봉건적 체제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국제적인 체제다.
The nature of the units (구성단위) and their common forms of interaction prior to and after the Thirty Years' War were substantially different.
본질의 구성단위와 그들의 이전 상호 작용의 일반적 형태는 30년 전쟁 이후와 실제적으로 다르다.
The essential rules of the system were developed and articulated in the Treaty of Westphalia.
체제의 본질적인 규칙들은 개발 되고,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The Treaty of Westphalia laid out a number of rules of the game (or institutions) [게임의 규칙 혹은 제도] for international relations that formed the basis of the modern states system.
현대의 국제 체제의 기초를 이뤘던 국제 관계를 위해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게임의 규칙 혹은 제도를 내놓았다.
First, it established the principle of state sovereignty, which implied the principles of noninterference and legal equality of states.
첫 번째,그것은 불간섭의 원리와 국가의 법적 평등을 의미하는 국가 주권의 원리들을 확립했다.
According to these principles, every state regardless of its size or capabilities should be considered legally equal and should have the right to make its own decisions.
이 원리들에 따르면, 크기 또는 능력들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는 법률적으로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자신의 결정들을 하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Second, the system of a professional diplomatic corps [직업외교단] was established.
두 번째,직업외교단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Diplomatic immunities [외교면책] were the underlying principle that made the new system of exchanging professional diplomats possible.
[외교면책]은 직업외교단을 교환하는 새로운 체제다.
Third, war in the eighteenth century was highly institutionalized [제도화], and was recognized as a legitimate instrument to promote and protect states’ interests.
셋째,18 세기의 전쟁은 제도화 되었으며, 권익보호와 장려에 합법적인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In the period of 1648-1814, systemic stability (maintenance of the formal and informal rules of the game) was maintained, and dynastic political orders (as opposed to feudal orders) based on sovereign independence of states were sustained.
1648-1814의 시대에, 조직의 안정성(게임의 공식, 비공식 규칙의 유지보수) 은 유지되었고, 왕조정치(봉건 명령에 대항하는)에 따라 국가의 주권독립 기반이 지속되었다.
The European system was divided into a number of dynastic states and lesser entities, but there was a sense of European cultural unity.
유럽의 체제는 많은 왕조 국가들과 작은 존재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문화적인 단일의 관점이 있다.
Christianity united the Europeans and set them apart from the Ottoman "heathens" and the "barbarians" in non-European lands.
기독교는 유럽 사람들을 연합 하였고,비유럽의 땅들에서 오스만 사람“이방인”과 “야만인들”로부터 떨어져서 그들을 구분하였다.
France was at the center of the European political system:
프랑스가 유럽의 정치적인 체제의 중앙에 있었다. :
French was the common language among aristocrats and France set the cultural standards for Europe.
프랑스어는 귀족들 사이의 주요 언어였고, 그리고 프랑스는 문화적인 표준들을 유럽에 맞췄다.
The concept of nationality (nationalism) was not yet fully developed.
국민(민족주의)의 개념은 충분히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Political loyalties were personal rather than national.
정치적 신뢰는 국가보다 개인이었다.
The European continent was culturally and religiously united, but politically divided.
유럽 대륙은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연합했지만, 정치적으로 나눠졌다,
The period from 1648 to 1814 was stable in the sense that the inter-dynastic politics retained their essential
1648~1814 사이의 기간은 안정적인 의미에서 남북 왕조 정치가 유지되었다
Earlier we talked about the notion of state sovereignty.
앞에서 우리들은 국가 주권의 개념에 대해 말했다.
Since the concept of
state sovereignty is central to the modern states system, I will repeat a few important features of sovereignty.
국가 주권의 개념으로부터 현대 국가 체제의 기본이 되었으며, 주권의 몇가지 기능을 반복하면.
The modern conception of sovereignty was first formulated in the second half of the sixteenth century with reference to the new phenomenon of the territorial state.
주권의 현대의 개념은 영토 국가의 새로운 현상에 관해서 16 세기의 후반에서 처음으로 공식화되었다.
By the end of the Thirty Years’ War (1648), state sovereignty as supreme legal power over a certain territory has become widely accepted.
30년 전쟁 말, 특정지역에서는 합법적 권력으로 국가 주권이 통용되었다.
It meant the victory of the territorial princes [영토적 군주] over the universal authority [보편적 권위] of emperor and pope, on the one hand, and over the particularistic aspirations of the feudal barons, on the other.
그것은 영토적 군주의 승리, 황제와 교황의 보편적 권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특별한 봉건 귀족의 포부을 말한다.
Thereafter the monarch was the sole source of man-made law--that is, of all positive law [실정법].
그 후 군주는 인간이 만든 실정법의 sole source 이다.
Sovereignty is supreme law-making and law-enforcing authority within a territory and, in consequence, implies independence from the authority of any other nation and equality with it under international law.
주권은 최고의 법률 제작과 법률 - 영토 내에서 권위를 시행하고, 결과에 있어 국제적인 법률에 따라 다른 민족들과 함께 '평등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의미합니다.
You should keep in mind that states are equal only in the legal sense.
국가들은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기억해라.
This legal equality is well manifested in the principle of "one state, one vote" in settling international disputes.
이 평등한 법률은 국제적 논쟁을 안정시키는데 있어서 “하나의 국가, 하나의 투표“라는 원칙에 근거한다.
B. The Treaty of Utrecht and the Balance of Power System
B. 유트레히트 조약과 세력 균형 체제
In addition to state sovereignty, balance of power was firmly established as a central principle governing the European system.
국가 주권 뿐만 아니라, 권력의 균형은 유럽 체제를 통치로 확고히 설립되었다.
The dominant powers in Europe maintained stability through the balance of power mechanism.
유럽의 지배적인 힘들은 세력 균형의 구조를 통하여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For most of the period, there were 8 powers [강대국], and many lesser powers [약소국].
대부분의 시대에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있다.
As a result, no single power dominated the European system.
결과적으로,한 개의 힘은 유럽의 체제를 지배하지 않았다.
In reaction to the proposed unification of the French and Spanish crowns in the early 1700s, which might have led to French hegemony [패권] in Europe, the other powers went to war against France to prevent French domination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스페인계승전쟁].
1700 년 초기에 프랑스와 스페인 통일 제안에,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패권이 유리했었고, 프랑스의 지배를 막기 위해 다른 힘들이 움직였다. [스페인계승전쟁]
The Treaty of Utrecht (1713), which ended the war, reaffirmed the principle of the sovereign independence of the dynastic states, and established balance of power as a mechanism for systemic stability.
유트레흐트 조약은 (1713), 전쟁을 종식, 그리고 조직의 안정성에 대한 메커니즘으로 권력의 균형 설립, 왕조 국가의 주권 독립의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Utrecht is a city of central Netherlands south-southeast of Amsterdam.
유트레흐트는 중부 네덜란드 남동 암스텔르담의 도시이다.
The Treaty of Utrecht ended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3).
유트레흐트조약은 스페인계승전쟁을 끝냈다,(1701-1713).
When Napoleon tried to dominate Europe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other powers in Europe once again went to war against France to restore balance of power and to preserve the dynastic states system in Europe.
나폴레옹이 초기의 19 세기에 유럽을 지배하려고 했을 때, 유럽의 다른 힘들은 세력 균형을 본래 상태로 되돌리고, 유럽에서 왕조국가 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다시 한번 프랑스와의 싸웠다.(참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람)
After Napoleon's defeat in 1815, the Congress of Vienna [비엔나회의] restored the old multipolar order with five major powers balancing each other.
1815년의 나폴레옹의 패배 후 [비엔나의 회의]는 서로의 세력 균형을 잡고 있는 5개의 주요국들의 오래된 질서를 본래 상태로 되돌린다.
Subsequently, relative peace prevailed in Europe between 1815 and 1914.
그 후, 1815 ~ 1914사이 유럽의 평화가 지속된다.
Balance of power was the effective mechanism for peace and stability in Europe in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세력 균형은 18~19세기 유럽의 평화와 안정적인 효과적 구조이다.
After the demise of the Holy Alliance [신성동맹], the great powers continued to assume responsibility for the settlement of political issues.
[신성동맹]의 종지 이후, 강대국들은 식민정치의 책임이 지속되었다.
They maintained peace and stability in Europe through ad hoc conferences generally known as the Concert of Europe [유럽협조체제].
그들은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특별회담을 통해 유지하였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럽협조체제
C.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Napoleonic Wars
C.프랑스 형명과 나폴레옹 전쟁
Although the world that emerged after the Congress of Vienna still used a balance of power system,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Napoleonic Wars radically changed the nature of international politics.
비엔나 의회 의 등장 이후 세상은 아직 세력 균형 체제를 사용했지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근본적으로 국제 정치의 본질을 바꿨다.
The French spread the idea of popular sovereignty [국민주권], meaning that political power should come from the people, not from monarchs.
프랑스는 국민주권을 외쳤고, 그것은 국주가 아닌 사람이 정치의 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During the Napoleonic Wars, this revolutionary idea of popular sovereignty was spread throughout Europe, and consequently the dynastic states system and the balance of power were directly threatened.
나폴레옹 전쟁 동안, 국민주권의 혁명적 생각은 유럽의 전체에 펴졌다. 그리고 왕조국가 체제와 균형은 직접적으로 위협되었다.
Napoleon also changed the nature of warfare by initiating mass mobilization [대중동원] for war efforts, discarding a professional and mercenary army.
나폴레옹 또한 전문적 용병 군대를 페기하고자 전쟁의 본성을 [대중 동원]을 이용하여 바꾸었다.
Thus the masses [대중], for the first time, were drawn into war and foreign policy processes.
이것은 처음으로 대중에 의한 전쟁과 외교정책과정이었다.
The ideology of democratization and nationalism grew stronger in the nineteenth century and eventually changed the rules of the game in the international system. Consequently, dynastic states gradually gave way to nation-states.
민주화와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는 19 세기에 더 강력해지고, 국제적인 체제에 결국 게임의 규칙들을 바꿨다.
In this lesson, we talked about the balance of power system and related concepts such as state sovereignty and balance of power.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힘 균형 체제에 대해 말했고 국가 주권 같은 개념들과 세력 균형을 이야기했다.
We also talked about landmark treaties such as the Treaty of Westphalia (1648) and the Treaty of Utrecht (1713), which confirmed the principles of state sovereignty and balance of power.
우리는 또한 두 조약들에 대해 말했다. 두 조약으로부터 국가 주권의 원리들과 세력 균형을 확인했다.
We also discussed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Napoleonic Wars and their impact on the international system.
우리는 또한 프랑스의 혁명과 나폴레옹전쟁과 국제체제에의 그들의 영향을 논의했다.
Although Napoleon was defeated in the wars, his ideas of people’s sovereignty and mass mobilization for war had a tremendous impact on the international system and eventually the European monarchies were replaced by nation-states.
비록 나폴레옹이 전쟁은 실패했지만 국민주권에 대한 그의 생각과 전쟁의 대중동원은 국제적 체제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결국 유럽의 군주정치는 국민-국가로 바꾸게 되었다.
In next lesson, we will continue to discuss the balance of power and examine the origins of World War I.
다음 수업에서는 세력 균형을 논의하기를 계속할 것이고 제 1차 세계 대전의 기원들을 조사할 것이다.
LESSON 11 THE BALANCE OF POWER SYSTEM, 1648-1914 (2/2)
Readings: Mingst, 25-34.(review)
In this lesson, we will discuss a central concept of international politics, i.e., balance of power.
We will also examine the causes of World War I using the three levels of analysis.
Lesson Objectives
After completing this lesson, you will be able to
* understand the concept of the balance of power;
* apply the three levels of analysis to explain the causes of World War I.
1차세계대전의 원인을 3단계로 분석할 것 이다.
Lecture Notes
A. The Balance of Power 세력 균형
The realists [현실주의자들] believe that the balance of power [세력균형] is the most effective mechanism for stability in the international system.
현실주의자들은 세력 균형이 국제 체제의 안정에 효과적 구조라고 믿는다.
The multipolar balance of power system [다극적세력균형체제] in the nineteenth century (1815-1914) produced the longest interval without world war in the modern state system.
19세기의 [다극적세력균형체제]는 현대 국가 체제에서 세계 전쟁 없는 가장 긴 기간을 만들었다,
Balance [균형] is the synonym of equilibrium [평형].
균형은 평형과 유사한다.
It signifies stability within a system composed of a number of autonomous forces.
[Balance ---> Change ----> Balance ]
그것은 체제가 다수의 안정적이라는 자율적 힘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BALANCE [저울]
Two assumptions [가정] underlie the policy of “balance of power”:
세력 균형 정책의 기초 두개의 가정:
(1) the states (units) to be balanced are necessary for the international system or are entitled to exist;
국가들은 국제적인 체제를 위해 세력 균형이 필요하다 또는 존재할 권리가 있다.
(2) without a state of equilibrium (balance of power) among them, one state will gain ascendancy over the others and may ultimately destroy them.
국가사이에 균형이 없다면 1개의 국가가 다른 것들의 위의 우세를 얻을 것 이고,최종적으로 그들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The Goal of the Balance of Power 세력 균형과 목표
The goal of balance of power is to preserve [보존] of all the states (or at least the major powers[강대국]) of the international system and sustain international stability.
세력 균형과 목표는 모든 국가들의 보존, 국제적 체제, 국제적 안정이다.
The goal is not to maintain peace, but to maintain stability.
평화를 지속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The major powers of the system are willing to go to war in order to restore systemic stability and equilibrium.
강대국의 체제는 안정과 평형의 조직을 되돌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The balancing may involve either diminishing the power of the stronger power or increasing the power of the weaker power.
균형은 강한 세력이 작아지거나, 약한 세력의 힘이 증가하거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In other words, states support the weak side (or sides) to prevent any one state from attaining predominance.
즉, 국가들은 다른 한 국가가 우월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한 쪽을 지원해 준다.
To put it simply, the balance of power dictates that states (major powers) always support the "underdog" [약자] and oppose the "top dog" [강자] to prevent any country from becoming too powerful.
정리하면, 세력 균형은 강대국이 언제나 약자를 지원하고, 강자를 방해하고, 강력해지는 어떤 나라를 저지함을 지시한다.
Systematic theoretic reflections of the balance of power started in the 16th century and culminate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세력 균형의 이론적 분류는 16세기에 시작하여 18,19세기에 정점에 달았다.
It was conceived as a protective device of an alliance of nations, anxious for their independence, against another nation's designs for world domination.
그것은 나라의 동맹의 보호장치, 그들의 독립에 대한 걱정, 세계 지배에 대한 다른 나라의 계획으로 생각되었다.
Examples:
a) The wars against France of 1789 against Napoleon
b) The coalitions that fought World War II against Germany and Japan
c) The Western bi- and multilateral alliances against the Soviet Union.
a) 나폴레옹을 향한 프랑스 전쟁
b) 독일과 일본과 싸운 2차대전의 동맹
c) 소련에 대한 서양의 다자동맹
The Methods of the Balance of Power 세력균형의 방법
The balancing process can be carried on either by diminishing the weight [무게추] of the heavier scale [저울접시]or by increasing the weight of the lighter one.
저울은 가벼운 추의 무게를 증가시켜 무거운 무게의 눈금을 계속적으로 절감시키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There are five methods to maintain balance of power.
세력균형 다섯 개의 유지 방법
(1) Divide and rule [분할통치]
This policy is to try to make or keep the competitors weak by dividing them or keeping them divided.
이 정책은 경쟁자들을 나누거나 나눈 경쟁자들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약한 경쟁자들을 만들거나 유지시킨다.
For example, the policy of France with respect to Germany was based on the divide and rule method.
예를 들면, 프랑스의 정책은 독일의 분열에 의거하고 규칙을 만드는데 관계했다.
From the 17th century to the end of World War II, it has been a consistent principle of French foreign policy either to favor the division of the German Empire into a number of small independent states or to prevent the coalescence of such states into one unified nation.
17세기부터 2차대전 끝까지, 많은 소형의 독립 나라들을 포함하는 독일 통치권 분배 행위와 또한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나라들이 연합하는 것을 방지하는 행위는 프랑스의 외교 정책과 일치하였다.
(2) Compensations [보상]
Compensations of a territorial nature were a common device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for maintaining a balance of power.
18~19세기에는 국가 영토 보상에 대한 공공의 장치가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다.
Examples:
a) The Treaty of Utrecht of 1713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 division of most of the Spanish possessions between the Habsburgs and the Bourbons
유트레흐트 조약(1713) (스페인 계승 전쟁)- 함브르크가와 부르봉 왕가 사이의 스폐인 영토 분배에 관한
b) the three partitions of Poland in 1772, 1793, and 1795 (among Austria, Prussia, and Russia)
1772,1793,1795의 폴란드의 삼분할(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의)
c) the distribution of colonial territories and the determination of colonial or semicolonial spheres of influence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식민지 영토의 분배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영역의 영향력 결정
In all these examples, the distribution of power would be approximately the same after the partitions [분할].
이러한 예들은, 힘의 분배는 분할 후와 점차적으로 같아 졌다.
(3) Armaments [군비증강]
The principal means by which a nation endeavors with the power at its disposal to maintain or re-establish the balance of power are armaments.
국가가 힘의 배치를 유지하거나 군사적 세력의 균형을 재확립을 노력 하는 것을 의미한다.
The armaments race is the typical instrument of an unstable, dynamic balance of power.
군비 증강의 과정은 특정한 불안정한 수단과 세력의 힘있는 균형이다.
This leads to an increasing burden of military spending, deepening fears, suspicions and insecurity.
이는 군사 지출의 증가 부담하고, 의혹 및 불안한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Before World War I, German and British navies and French and German armies were engaged in arms races.(무장 경쟁)
제 1차 세계 대전 전, 독일, 영국 해군들과, 프랑스 독일의 군들은 무장경쟁 속에 교전하고 있었다.
During the Cold War, the US and the Soviet Union were engaged in arms race, and armaments (and arms race) led to balance of power.
냉전 동안, 미국과 소련은 무장경쟁 중이었고, 그리고 군대들(무장경쟁) 세력의 균형을 가져오게 했다.
(4) Alliances [동맹]
The historically most important manifestation of the balance of power is in the equilibrium between two alliances.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세력 균형의 형태는 두 동맹 사이의 평형상태이다.
Nations A and B, competing with each other, have three choices in order to maintain or improve their relative power positions.
국가 A, B, 서로 경쟁하고,그들의 관련하고 있는 힘의 상태들을 유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3개의 선택들을 가지고 있었다.
They can increase their own power,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they can add to their own power the power of other nations, or they can withhold the power of other nations from the adversary.
그들은 추가적으로 그들 자신의 권력을 다른 나라의 권력, 또는 그들은 적이 다른 나라의 권력을 억제할 수 있다.
(5) Balancer [균형자]
The system may consist of two scales plus a third element, the "balancer."
체제는 제3의 요소 “균형자”를 더하여 두개의 규모로 이뤄져있다.
The balancer is not permanently identified with the policies of either nation or group of nations.
균형자는 국가 정책이나 국가 그룹과 영구적으로 일치하지 않다.
Its only objective within the system is the maintenance of the balance.
체제 내의 오직 목적은 균형의 지속이다.
To paraphrase a statement of Lord Palmerston (British Foreign Secretary in 1848):
Lord Palmerston의 진술을 부연하면 :
“While the holder of the balance has no permanent friends, it has no permanent enemies either; it has only the permanent interest of maintaining the balance of power itself.”
힘의 소유자는 변하는 아군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적이다. 또한 그것은 그것 자신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불변의 관계이다.
The balancer is in a position of "splendid isolation."
균형자는 화려하고 고독한 위치이다.
Its isolation is splendid: for, since its support or lack of support of the decisive factor in the struggle for power, its foreign policy is able to extract the highest price from those whom it support.
화려하고 고독함: 그것을 유지하고, 또는 유지의 부족은 힘으로부터 버둥거리는 결정적 요인이고, 그것을 유지함으로부터 외국 정책은 높은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The classic example of the balancer was Great Britain.
균형자의 대표적 예는 영국이다.
Henry VIII has once said, "he whom I support will prevail."
헨리 팔세는 “그 누군가가 내 버팀을 이길 것 이다.”
He had himself painted holding in his right hand a pair of scales in perfect balance,
one of them occupied by France, and the other by Austria, and holding in his left hand a weight ready to be dropped in either scale.
그는 토지에 완전한 균형을 한쪽에는 프랑스를 점령하고, 다른 한쪽은 오스트리아를 점령함으로 무게를 떨어뜨릴 준비를 하였다.(?)
Henry VIII (아... 이거 교양 맞어?)
Great Britain was capable of playing a balancer because she had enough power and was detached from European affairs.
그녀는 유럽의 관심사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균형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This tradition of British foreign policy disappeared in recent years with the decline of British power and the growth of American and Russian power.
이 영국 전통의 외교 정책은 영국 세력의 저하와 미국, 러시아 세력 성장으로 근 기간에 사라졌다.
Today the balance of power of Europe is no longer the center of world politics.
오늘날 유럽은 세력의 균형은 더 이상 세계 정치 중심이 아니다.
During the Cold War era (1945-1991), the European balance of power has become a mere function of the world-wide balance of which the US and the Soviet Union were the main weights.
냉전 시기 동안 유럽의 세력 균형은 미국과 소련의 무게추에 의한 단순한 균형이 되었다.
B. The Causes of World War I 1차 세계 대전의 원인
During World War I, 15 million died.
1차 세계대전 동안 15만명이 사망했다.
After the war, three empires (the Russian empire, the Austria-Hungarian Empire, and the Ottoman Empire) were destroyed.
전쟁 후 3개의 제국이 파괴되었다.(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
And after the war the US and Japan became major players of international politics.
그리고 전쟁 후 미국과 일본은 국제 정치에 큰 세력이 되었다.
Why did World War I occur? 1차 대전은 왜 일어났는가?
The causes of World War I may be explained in terms of the three levels of analysis.
1차 대전의 이유는 3단계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At the international system level, the rise of German power and the increased rigidity in the alliance system were responsible for World War I.
국제 체제 단계에서, 독일 힘의 증가와 동맹 체제의 증가는 1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After German unification in 1871, German chancellor [수상] Otto von Bismarck [오토 폰 비스마르크] was able to allay the sense of threat on the part of his neighbors until 1890.
1871년 독일 통일 후, 독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90년 까지 공포의 대상이었다.
After Bismarck was forced to resign as chancellor in 1890, the alliance systems of Europe grew rigid until two fixed alliances (a "bipolar" system) emerged.
비스마르크가 1890년에 수상을 사임할 것을 강요당한 후, 유럽 동맹 체제는 두개의 고정된 동맹들로(“양극”체제)성장하였다.
One alliance (the Triple Alliance [3국동맹]) included Germany, Austria, and Italy and the other (the Triple Entente [3국협상]) comprised Russia, France, and Britain. (At the beginning of World War I, Italy changed sides and joined the Triple Entente.)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포함한 3국 동맹, 러시아 프랑스 영국을 포함한 3국 협상
(1차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가가 3국협상에 가입하였다.)
The polarization [극화] of alliances grew more and more rigid, and eventually led to World War I in 1914.
동맹국들의 극화는 더욱 더 단단하게 되었고,결국 1914년에 제 1차 세계 대전을 가져오게 했다.
At the state level, the internal crises of the declining Austro-Hungarian and Ottoman empires, and the German elite’s efforts to postpone democratic reforms at home were partly to blame for World War I.
국가 단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쇠퇴의 내부적 위기와 오스만(터키) 그리고 독일 정예의 전력은 본국에서 부분적으로 1차대전 위해 비난하며 민주주의 개혁을 연기한다.(?)
At the individual level, mediocre leaders of European powers at that time, particularly Kaiser Wilhelm II of Germany, who felt a sense of inferiority, facilitated the process that resulted in war.
개인적 단계에서, 그때는 유럽의 평범한 지도자의 힘들 중 특히 독일의 빌헬름 2 황제의 열등감에서 오는 느낌은 전쟁을 촉진하였다.
All these factors from the three levels of analysis were causes for the war.
3단계의 이러한 요소들이 전쟁의 원인이다.
But the immediate, precipitating cause was the assassination of the Austrian Archduke Franz Ferdinand by a Serbian nationalist in Sarajevo in July 1914.
그러나 직접적 촉진 원인은 1914년 7월의 사라예보의 세르비아 국가주의자에 의한 오스트리아의 Archduke Franz Ferdinand의 암살이었다.
By now, you should clearly understand that multiple factors caused World War I and that the three levels of analysis are very useful in analyzing international phenomena, including World War I.
1차 대전의 복합적 원인들을 이해하였다.
LESSON 13 집단안보체제 (1/2)
수업 개관
우리는 집단안보체제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더욱 명확하게는, 우리는 국제연맹의 흥망성쇠와 제2차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하여 토론할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세력균형과 외교기밀은 전쟁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비난받았다. 우드로 윌슨은 국제연맹과 평화와 번영의 보증인인 국가안보를 고안했다. 전간기 동안, 이상주의(자유주의)는 현실주의를 대신하였다. 평화 장치로서의 집단안보체제는 실패로 끝났다. 연맹은 주요 권력들이 외교 정책 목표를 공유하지 않았고 연맹은 함께 행동함을 통해 국가들을 보호하기에 구조적 약점을 보유하고 있어 침략국을 효과적으로 응징하지 못했다.
수업 목표
이번 수업을 끝내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알 수 있다.
* 국제연맹과 집단안보가 일어나게 된 역하적인 배경을 안다.
* 집단안보의 효율적인 운영의 토대 상황을 이해한다.
Study Notes
A. 윌슨의 이상주의와 국제연맹
세력균형은 국제 평화와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에 사용되는 주요 정책기구 였으나, 제1차세계대전을 예방하지 못했다. 세력균형은 최악의 인류 비극인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비난을 받았고 이것은 특히 지유주의자들에게 효과적인 평화 기구로서 불신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세계평화를 위해 집단안보체제라고 불리는 새로운 기구(또는 체제)가 고안되었고 제1차세계대전 이후 시범운영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집단안보체제를 세력균형체제로 바꾸는 것을 추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국제평화와 안정이 권력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해 달성될 것 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지향적인 평화체제로서의 집단안보에 반해 세력균형은 널리 받아들여졌고 유럽에서 실행되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통한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제1차세계대전에 참여했다. 미국의 이상주의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평화 프로그램에 의해 명확하게 명시되었고, 그가 발표한 14개항이 1918년, 1월 8일 의회에 받아들여졌다. 윌슨은 “국가 총연합은 정치적 독립과 크고 작은 권력들이 같은 영토보전의 상호 보증적 여유가 있는 목적을 위한 특정한 서약이 형성 되야한다”라고 공표했다. 윌슨은 그가 정의롭고 영구적인 평과를 이루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었던 기관인 국제연맹의 수장이었다. 국제연맹은 제1차세계대전 종결 서약의 필수 요소로서 1919년 창설되었다. 연맹은 두 가지 측면에서 특징 있었다. 첫째, 그것은 연속적인 토대의 기능의 일반적 정치적 본질이로서 국제조직 상설 설립의 첫 시도였다. 둘째, 그것은 집단안보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떠한 침략국이라도 나머지 구성국들에게 응징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B. 집단안보란 무엇인가?
집단안보는 무력 침약으로 위협을 받은 어떠한 국가도 원조한다는 의식을 가진 모든 국가들 간의 협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무력 공격하면, 나머지 국가가 침략국에 대항해 집단을 이룬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집단안보의 의미를 잊는다면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모토를 가진 “삼총사”를 기억해라. 만약 그들 중 하나가 위험에 처하면 다른 친구들이 그를 돕겠다는 맹세이다.
집단안보는 내부 지향적인 의미에서 동맹과 다르다. 동맹이 외부에 상호 위협을 가하는 형태라면, 집단안보는 체제 내부에서 위협의 발생을 조정하기 위해 발생되었다. 집단안보체제의 기능이 효율정이기 위해서는 몇가지 요구사항이 충족되어야 한다:
(1) 국가는 반드시 평화는 불가분이며 어떠한 국가에 대한 침약도 모두에 대한 위협임을 동의해야 한다.
(2) 국가는 반드시 집단안보 원칙에 부합하는 행동을 서약해야한다.
(3) 집단안보는 공격에 대항하는 적절한 군사력과 그것의 처분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결정이 가능한, 조직을 구성하는 주요한 결정들이 필요하다.
집단안보체제는 국제연맹규약으로 처음 구체화되었다. 윌슨은 이것이 (외교기밀과 권력정치를 포함하는)세력균형체제를 대체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C. 만주의 실패 The Manchurian Failure (만주 : 중국 동북부의 구칭)
집단안보체제의 첫 시험은 1931년 일본이 만주 지방을 공격해 무크덴의 수도를 점령하면서 찾아왔다. 1931년 9월, 일본 정부는 만주지방의 토착중국인 무리가 일본이 관리하는 만주철도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본이 그 사건을 계획했고 만주 전체지방을 통제하고 이후 만주 위의 중국 영토를 침략하기 위한 주요 군사 공격을 시도할 구실로 이용했다.
연맹의 회합은 일본의 침략에 유죄를 선고했다. 1932년 1월 7일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미국이 어떠한 영토적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중국에서는 이를 위해 무력을 이용한 영향으로 소위 “스팀슨 독트린”(이후 국가의 그의 장관인 헨리 스팀슨)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일분쟁에 불법을 조정하기 위한 중재하지 않았다. 1933년 일본은 연맹을 간단히 철회하고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별한 권리를 주장했다. 만주 정복 이후, 일본은 Manchukuo(중국말로 만주국)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루즈벨트 정권은 응징을 하는 대신 일본을 달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중국에 중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많은 미국 사람들은 중국은 전혀 그들의 현재 지도부 하에서 현대화 되지 않았고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분쟁이 계속 되는 한, 중국이 미국의 지지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만약 당신이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를 보았다면 당신은 아마 영화의 첫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일본이 만주지방을 침약한 이후, 그들은 청왕조의 황태자를 만주지방의 황제 위치에 두었으나, 그에게는 어떠한 실질적 권력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 황제는 순전히 일본인들의 중국 침략을 위해 일본인에 의해 이용당했고 조종당했다.
연맹은 일본에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않았고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속했다. 만주 사건은 국제연맹에서 제도화 된 집단안보체제가 침약을 제지하거나 응징하는 면에서 완전히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D. 에티오피아의 붕괴 The Ethiopian Debacle
국제연맹의 집단안보체제의 두 번째 시험은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약이었다. 1935년 8월 2일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전면 공격을 퍼부었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무장공격은 각각의 연맹국과의 전쟁으로 숙고되어야 한다는 연맹규약 16조항에 호소했다.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력 침략국에 대해 국제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연맹의 50개국이 이탈리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 참여하였다. 연맹 합의는 경제 제재가 이탈리아에 대항해 무기수출과 군수품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8개월 동안 제재가 가해였고, 연맹국은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제재를 철회할 것을 표결했다. 다시 한번, 집단안보체제가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기구로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왜 유럽의 주요 강국들을 그때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 철회를 결정했을까. 이것은 권력 정치 때문이다. 1936년 초, 독일은 유럽 안보의 주요 위협에서 벗어났고 그들은 독일 나치 군사 위협을 협력하여 극복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협력을 원했다. 주요 강국, 특히 프랑스와 영국이 관계하는 한, 유럽의 세력균형은 집단안보에서의 에티오피아의 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만주와 에티오피아의 위기 둘 다 연맹은 집단안보의 원칙을 지지하는데 참패했다. 에티오피아 붕괴 이후, 연맹은 세계사회에서 신뢰를 잃었고 연맹을 통한 집단안보체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연맹의 실패는 결국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을 초래했다.
LESSON 14 집단안보체제 (1918-1939) (2/2)
Reading Assignment Mingst, 35-38 (review)
Lesson Overview 수업 개관
In this lesson, we will continue to deal with the collective security system.
When Woodrow Wilson conceived the League of Nations and the collective security system embodied in it, he thought he found the solution for eternal peace.
But the collective security system as a peace mechanism failed miserably and did not prevent World War II.
In this lesson we will examine how League's weaknesses contributed to the political conditions that resulted in World War II.
이 단원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집단안보체제에 대해 다룰 것이다.
우드로 윌슨이 국제연대를 고안했고 집단안보체제를 고안했을 때, 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한 해결책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화 기구로서의 집단안보체제는 비참하게 실패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다.
이번 단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대의 약점이 제2차사계대전의 결과를 초래하는 정치적 환경에 기여했는지를 조사할 것이다.
Lesson Objectives 수업 목표
After completing this lesson, you will be able to
* grasp the weaknesses of the League of Nations system;
* understand the causes of World War II.
수업이 끝나면 당신은 아래의 사항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 국제체제의 연대의 약점을 이해할 수 있다.
* 제2차세계대전의 원인을 알 수 있다.
Study Notes
A. The Failure of the League Experiment
The League of Nations turned out to be a great failure as a peace mechanism. The collective security system was designed to replace the balance of power system.
In a balance of power system, peace and stability are maintained by constantly maneuvering to restore equilibrium (or balance) among major powers [강대국].
In a collective security system, peace is guaranteed (at least in theory) by collectively punishing a military aggressor.
As you recall, it’s predicated on the “all for one, and one for all” principle.
A. 연대 시도의 실패
국제연대는 평화기구로서 실패로 끝났다. 집단안보체제는 세력균형체제를 대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세력균형체제에서 평화와 안정은 강대국 사이이 균형을 복구하기 위해 끊임없는 시범을 통해 지속되었다.
집단안보체제에서 평화는 군사적 침략자에 대한집단적인 응징으로 (적어도 이론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 당신이 상기하듯이 이것은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원리를 내포한다.
League's failure can be ascribed to a number of factors.
First, it had procedural problems that hampered effective punishment against aggression.
The League's decisions to take military action had only the force of recommendations.
Therefore, it was up to each state to decide whether to apply sanctions.
In addition, the rule of unanimity for most decisions made exercise of a veto by an aggressor possible.
연대의 실패는 많은 요소들에 의해 기인된다.
먼저, 이것은 침략자에 대한 효율적인 응징을 방해하는 절차적인 문제가 있다.
연대의 군사적 행동을 취하는 결정은 단지 권고의 권력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제를 가할 것인가 하는 결정을 하는 각국에 달려 있다.
게다가 대부분이 규칙에 대해 만장일치 규칙으로 침략국에 의한 거부권의 행사가 가능했다.
Second, major powers at that time did not share a common interest in upholding the principles of the League of Nations.
France was primarily interested in guarding against German resurgence as a military power.
Britain was mainly concerned with protecting the vital interests of its Empire. When Italy invaded Ethiopia in 1935, France and Britain were more interested in countering the threat from Nazi Germany than in invoking collective security against the aggression.
France and Britain were reluctant to isolate Italy in international society because they needed Italian cooperation in countering German threat.
둘째, 그 당시의 주요 강국 들은 세계연대의 원리를 지지하는 공통이익을 공유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근본적으로 군사력 측면에서 독일의 부활을 경계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영국은 제국의 중요한 이익을 수호하는 것을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을 때, 프랑스와 영국은 침략에 대한 집단안보에의 호소보다 독일 나치의 위협에 더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독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이탈리아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것을 꺼렸다.
Third, the nonparticipation of the U.S. in the League greatly weakened it from the very beginning.
(The U.S. Senate [상원] refused to ratify [비준] the Covenant of the League.)
The domestic mood in the U.S. after World War I favoring international isolationism [고립주의] was responsible for its non-participation.
셋째, 미국의 연대 불참은 그것을 처음에 비해 더욱 약화시켰다
(미국 상원은 연대규약 비준을 거부했다)
국제 고립주의 지향적인 제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국내상황은 연대의 불참에 책임이 있었다.
Fourth, the economic nationalism in the wake of the Great Depression and the polarization of major powers into the status quo [현상유지] (Britain and France) and revisionist powers [수정주의 혹은 현상타파] (Japan, Italy and Germany) in the early 1930s facilitated the breakdown of the League.
넷째, 대공황을 계기로 경제적 민족주의와 현상유지에 강국의 양극화와(영국과 프랑스), [수정주의 혹은 현상타파] (일본 이탈리아 독일)는 1930년 초반 동맹의 붕괴를 촉진하였다.
The brief experiment in collective security completely failed when Hitler started World War II.
히틀러가 제 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을 때 집단 안전 보장의 짧은 실험은 완전하게 실패했다.
Thus, the Wilsonian vision of creating a new world order collapsed in the face of grim realities.
따라서 Wilsonian의 창조 시각은 새 세계 붕괴의 냉혹한 진실의 한 표면이다.
B. The Origins of World War II 2차 대전의 기원
Hitler came to power in 1933. 히틀러는 1933년 힘들 잡게 된다.
Soon thereafter he embarked on foreign expansion and an attempt at world domination.
곧 그 후 그는 외국팽창과 세계 습격의 시도에 착수했다
His foreign adventure proceeded in four phases.
그의 외국 모험은 4단계로 행해진다.
First, he destroyed the Versailles system that demanded Germany to pay extremely high war reparations [전쟁배상금] to war victors and constrained Germany's military capability.
첫 째, 그는 독일에 요구했던 전쟁 승리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높은 [전쟁배상금]과 한정된 독일의 군사 능력을 요구했던 베르사이유 시스템을 파괴했다.
In October 1933, Germany unilaterally withdrew from the League of Nations and from the disarmament conference [군비축소회의] sponsored by the League.
1933년 10월, 국제 연맹으로부터 독일의 일방적 군비 폐기론 철수와 국비축소 회의로부터 연맹의 보증을 받는다.
In March 1935, he announced that Germany would no longer limit the strength of its army to 100,000 men and would triple the size of its army and build an air force.
1935년 3월, 그는 독일이 100,000명의 남자들에게 군의 강함을 제한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고, 군의 크기를 3배로하고, 공군을 만든다.
Thus, Hitler disregarded the military clauses of the Versailles Treaty.
따라서 히틀러는 베르샤유조약 중 군대의 조약을 무시한다.
In March 1936, Hitler disregarded the de-militarized status [비무장지위] of the Rhineland by deploying German troops there.
1936년 3월, 히틀러는 독일의 군대를 배치함으로 Rhineland 지방의 비무장 지위를 무시한다.
Second, Germany conquered the small neighboring states.
둘째, 독일은 작은 인근의 국가들을 정복했다.
In 1938, Germany reunited with Austria.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재결합 하였다.
In 1938-39, Germany annexed Czechoslovakia.
1938-39년 독을은 체코와 합병했다.
In September 1939, Germany conquered Poland.
1939년 독일은 폴란드와 합병했다.
Third, in 1940 Germany achieved predominance in Europe by defeating Norway,
Holland, Belgium, and France.
셋째, 1940년 독일은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쳐부수면서 유럽에서 우월을 달성한다.
Fourth, Germany invaded the Soviet Union in June 1941 and declared war on the United States, moves that turned out to be serious mistakes of political and military strategy.
넷째, 독일은 1941년 6월, 소련을 침략하고, 아메리카 합중국에 선전포고하고, 정치적이고 군사전략의 중대한 실수들을 저지른다.
These mistakes eventually led to the demise of Hitler and Germany in World War II. 이 실수들는 결국 제 2차 세계 대전의 히틀러와 독일의 종말을 가져오게 했다
When Hitler attacked Poland in September 1939 (and started World War II), the League experiment with the collective security system finally came to an end.
1939년 9월(2차대전이 시작됨)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했을 때, 집단 안보체제와 함께 동맹의 실험은 끝이 난다.
The causes of World War II can be attributed to many factors.
2차 대전의 원인은 많은 요소를 가져왔다.
At the personal level, Hitler's personality and ambitions were largely responsible for it.
개인의 측면, 히틀러의 성격과 야심들은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At the state level, the indecisiveness and ideological disputes of Western democracies, the widespread economic collapse following the Great Depression, and the U.S. policy of isolationism all contributed to the outbreak of World War II.
국가적 측면, 우유부단과 서양의 민주주의들, 대공황 후에 광범위하게 미치는 경제의 붕괴와 고립주의의 미국 정책의 공론의 논쟁들에 모든 것이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생에 공헌했다.
At the systemic level, the Versailles treaty [베르사이유조약/ 1차대전을 종결시킨 평화조약으로 프랑스 파리근방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that included harsh demands on Germany eventually stirred up German nationalism, and led to the rise of Hitler.
조직적 측면,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에 심한 요구들은 결국 독일의 민족주의를 휘젓고, 히틀러의 상승을 가져오게 했다.
Furthermore, the exclusion of the two great powers, i.e., the Soviet Union and the U.S., from the League of Nations greatly undermined the collective security system embodied in the League of Nations.
더욱이, 국제연맹으로부터의 2개의 큰 힘들(즉 소련과 미국)의 제외는 대단히 국제연맹 의 집단안보체제 실현을 훼손 시켰다.
Lesson 16 : 테러 SYSTEM에서 [테러의 균형 체제], 1945년에서 1991년 사이의 균형 (1 / 3)
Readings : Mingst, 38-49.
수업 개요
다음 세 가지 수업에서 우리는 양극 체제와 냉전으로 특징지어지는 2 차 세계 대전 이후의 체계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우리는 냉전의 원인과 국제적인 체계에서의 양극화로의 움직임을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입니다.
수업 목표
이 강의를 완료하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2 차 세계 대전 이후의 시스템의 주요 특징을 이해;
* 냉전의 원인을 인식
연구 노트
A. 답변 세계 2차 대전 이후의 시스템
2 차 세계 대전 후, 국제 체제의 새로운 유형이 나타났다. 새로운 국제 시스템은 3가지 측면에서 이후의 것 에 비해 구별되어졌다. 첫째, 제 3 세계 국가의 독립적인 역할로서 세계 정치를 훨씬 더 복잡하고 어느 때보다도 동적으로 만들었다. 2 차 세계 대전은 탈식민지화의 방향으로 변화에 큰 촉매제로 작용했다. 전쟁 동안 식민 권력들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해외 식민지와 권력을 잃었다. 2 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프랑스, 영국, 독일의 충격에 휩싸였다. 1945 년 일본 패배 당시, 권력 공백이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졌다. 동시에, 원시 민족주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의 3 / 4의 지금의 유엔 회원들이 2 차 세계 대전 후 독립을 확보 후 국제 체제에 합류했다.
둘째, 세계 정치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변경되었다. 2 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서 나타났다. 그 뒤로는 소련이 두 번째로 강한 국가로 따라왔다. 세계 정치가 유럽을 지배하게 되면서 미국과 소련이 세계 정치에서 지배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핵무기의 발명은, 한 번에 전쟁의 본질을 변경했다. 핵 시대에 세계 대전은 더 이상 이성적인 행동 국익을 추진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핵무기는 단순히 매우 파괴적인 외교 정책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 세기의 초반,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경험. 1945년 이후, 제 3 차 세계 대전이 상상할 수없는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인류 문명의 종말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45년, 국가간 전쟁 후 동향 제한된 지역 전쟁의 방향으로 전향되었다.
B. 양극화 제도
2 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 시스템은 양극, 냉전 체제였다. 1947년에서 1989년 사이에서 국제적인 시스템은 양극 구조와 2 사이의 사상적 대립으로 상대편 진영을 묘사했다. 양극 구조가 크게 연합국의 지도자에 의해 2 월 1945 년에 열린 얄타 회의에서 결정된 이래로 이시기의 국제적인 시스템은 또한 얄타체제 불렸다. [얄타는 옛 소련에서 크림 반도에 있는 리조트 타운이다.]
[얄타 컨퍼런스에서 The Big Three(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1945년 2월]
양극 시스템에서 군사력과 외교력은 두 연합의 지도층에 몰려 있는데 국가 안보나 경제적 도움을 보상하는 것으로 동맹을 맺고 반대하는 나라는 동맹에 대한 처벌과 같은 것으로 협박한다. 양극화 세계에서, 미국과 소련의 의사 결정과 행동은 국제 관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떤 다른 나라의 외국 정책에 실시했던 일반적인 맥락을 설립했다.
C. 냉전의 유래
양극 시스템 내에는 충돌이 강한 이데올로기적 함축이 포함되어 있다. 글로벌 시스템에서 가장 만연하고 영구적인 갈등은 경쟁과 투쟁, 그리고 가끔 동쪽의 사회주의자 연합과 서쪽의 자본주의자 연합 사이에서 일어나는 위기에서 일어났다. 두 연합의 리더들은 상호간에 불신했고, 서로 두려워했다. 이 상호 불신과 두려움은 두 대립자들이 이념적인 장벽, 고정된 자리, 굳어버린 가치 뒤에 숨어있는 위험한 갈등적 상호관계인 냉전을 야기했다. 냉전은 ‘실제 전쟁 없이 격렬한 적대감의 기간’이었다. 양극 세계에서 세계 정치는 두 반대 이데올로기 사이의 철학적, 도덕적 대립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양극, 냉전 체제는 제로섬 게임과 미래세계를 위한 경쟁, 그리고 계속적인 자기정당화로 묘사될 수 있다. 냉전 체제 자체는 4 기간으로 세분화 수 있다 : 냉전 전쟁 (1947-1962)의 절정, 긴장 완화 (1963 - 1970), "작은 냉전"(1980 - 1985) 및 냉전의 종말 (1989).
냉전의 단계로
1945-1947 냉전의 시작
1947-1962 냉전의 절정
1963-1971 온건한 냉전
1972-1979 긴장의 완화 [데탕트]
1980-1985 작은 냉전
1985-1989 냉전의 끝
1989 - 탈냉전 시대의 선물
냉전이 왜 시작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세 가지 접근방법이 있습니다. 전통 주의자에 따르면, 세계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주의가 냉전을 초래했다. 스탈린의 폴란드에 자유선거 허용의 실패, 전쟁 후 북부이란에서 병력들을 제거하려는 그의 반항, 1948년 정부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원 인수, 소련의 베를린 장벽(1948-49), 그리고 북한의 남한 침공(1950)은 모두 냉전의 발병에 일익을 해주었다.
반면, 수정론자는 냉전의 원인을 미국인들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약했고, 이것이 외부적인 관계에서 적당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을 지적한다. 온건 수정론자는 1945년 4월 루즈벨트의 사망 이후 미국 정부의 반 공산주의, 강경파의 증가는 냉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급진 수정론자에 따르면 확장론자, 자본주의 충격, 미국 경제의 성격이 냉전 시대로 이끌었다고 한다.
포스트 수정론자들은 전후의 권력 균형의 양극구조에 집중한다. 2 차 세계 대전 후, 미국과 소련 두 진영 은 거의 모든 국가를 포함하고 있는 반대세력의 리더들을 생성시켰다. 두 연합의 리더간의 대결과 긴장은 불가피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세 가지 접근 방식들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냉전의 원인의 설명에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여섯가지 이슈들이 냉전의 발병을 이끌었다. (1)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에서의 자유투표를 열 것이라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트루먼을 소원하게 한 것(2) 미국은 소련에게 1945년 5월 갑자기 무기대여 원조 프로그램을 중단함으로써 소련의 불신에 부채질을 함 (3) 독일의 질문 때문에 차이는 의심과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두려움이 깊어지고 있음. (4) 1945년 7월 포츠담 회의에서 일본의 직업 영역에 대한 수요가 소련과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 것 (5) 미국의 소련과의 원자 폭탄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기로한 결정 (6) 동부 지중해의 소련의 확장론자 정책과 중동 -이란 북부, 터키, 그리고 특히 그리스 - 은 미국 정부에게 트루먼 독트린을 알리라고 유도함.
트루먼 독트린은 1947년 냉전의 시작을 표시한 것을 밝혔다. 그것은 미국이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세계의 자유 국민을 보호하려는 말이었다. 마샬 플랜은 (1947) 유럽 공산주의 파괴 상대로 서양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 설계된 경제 회복 프로그램이었다. 1955년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생성으로, 동서의 대립뿐만 아니라 군사측면 또한 잘 되었다.
상호 불신과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구소련은 공산권 지도자로서 소련과는 별도로 특정 목표와 행동 규범을 공유했다. 그들의 관심은 세계3차대전의 예방과 2차대전에서의 얻은 이익(독일이 갈라진것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약해진것을 유지하는것)을 유지하는 것에서 일치했다. 적어도 그들이 부분적으로 관심이 일치했기 때문에, 미국과 구소련은 특정 규범을 공유했다. 미국은 이것이 소련의 동유럽에대한 마주향한 주장의 정당성으로 인식했다(아니면 적어도 사실). 양측은 교전(그들은 서로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기 위해 노력)의 기본 규칙을 공유했다. 그들은 또한 혁명이 일으키는 불법적인
9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소련의 군사개입까지)국경을 넘는것 같은 규칙을 준수했다. 하지만, 그 국가의 해방 전쟁은 합법이었다. 1950년대 이후 핵억제력에 의해 지지된 연방 지도자에 의한 공유 목표와 규범들은 양극성 국제 체제를 오히려 예측 가능하고 평화롭게 만들었다.
다음 수업은 9 일, 우리는 테러과 냉전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 주도 요인을 검토 밸런스를 논의할 것입니다..
Lesson 18 : 테러 시스템 의 균형 ,1945-1991 (2 / 3)
readings : MINGST, 38-49. (review)
수업 개요
이 강의에서는, 우리는 2 차 세계 대전 이후 시대의 테러 시스템의 균형를 논의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평화와 안정을 위한 메커니즘으로 테러의 균형을 검사할 것이다. 테러의 균형은 그것이 거대한 핵무기의 파괴적인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독특했다. 둘째, 우리는 냉전 시대의 미 - 소 관계를 설명한다. 셋째, 우리는 냉전의 종말을 논의할 것이다.
수업 목표
이 강의를 완료하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 테러의 균형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 쿠바 미사일 위기와 미 - 소 긴장 완화를 이해,, 그리고
* 왜 냉전이 갑자기 1989 년에 끝났는가에 대한 이해.
연구 노트
A. 테러의 균형
국제 평화 및 전력 시스템의 안정성 - 균형에 대한 세 가지 시스템, 집단적인 보안 시스템, 그리고 테러 시스템 -들이 존재하는것을 기억하는가. 이전 수업에서 우리는 집단적인 보안 시스템 전력 시스템의 균형을 논의했다. 이제 우리는 테러 시스템의 균형에 대해 얘기하려고한다.
평화와 안정은 냉전 기간 동안 (1947-1989) 테러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 시스템은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핵 무기가 권력의 균형의 독특한 때로는 테러의 균형이라 불리는 양식을 생산했다. 미국과 소련은 순식간에 서로를 파괴할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핵억지력을 기반으로 그들 사이의 권력 균형으로 이끌었다. 2 차 세계 대전이후 테러시스템의 균형은 핵억지력을 기반으로 했다. 전쟁 억제력은 군비나 군사력 증대와 같은 행동에서의 위험이 얻을 수 있은 이득보다 더 크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과정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억지력은 다음과 같은 이해에 기초한다 : "당신이 나를 공격한다면, 나는 당신이 처음에 나를 공격하지 않았기를 바라도록 보복할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핵 억지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 (1) 손상을 줄 수 있는 능력 (2)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신빙성. 핵억지력을 적용하기 위해, 두 강대국들(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파괴시킬 수 있고 신뢰성을 실제 핵무기를 사용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는 핵보유능력을 갖고 있었다. 핵 억지력은 어떤 면에서 충분히 비이성적인 상호자살의 위험에의 핵무기 사용이다. 냉전 시대 동안, 미국과 소련 둘다 핵억지력을 서로에게(각자 다른이들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핵무기들을 갖고 있었고, 상호 파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같은 작은 나라는 미국과 맞서 핵억지력을 갖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핵보유력(핵무기가 없음)과 신뢰성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B. 냉전중의 미 - 소 관계
미국과 소련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동안 거의 핵전쟁까지 갔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두 강대국들이 심각하게 총력을 기울인 핵 전쟁을 (또는 상호 자살) 고민하고 있었던 가장 위험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핵 전쟁이 있었다면, 인간의 역사는 한번에 변경되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쿠바 미사일 위기동안 핵전쟁의 직전에 있었다. 하지만 비극적인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쿠바 위기 후에 두 강대국은 핵전쟁은 상호자살을 의미하고 긴장을 완화시킬 동의들을 끝나게 하는 것이라는것을 냉정히 깨닫고, 핵대립을 피했다. 위기 후,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핫라인을 설치했고, 군축에 대한 합의에 도달, 그리고 무역 확대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소련은 군사의 열등 기능 때문에 모욕을 당했다. 위기 후, 소련이 꾸준히 자사의 군사 능력을 강화하고, 1970 년대 초반, 미국과 군사 능력과 동등함(거의 평등) 얻을 수 있었다. 닉슨 행정부는 소련과 긴장 완화를 추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따라서, 1970년대에 동서 관계의 긴장의 이완이 있었다. 1972년 모스크바에 닉슨 대통령의 방문 후, 미국 - 소련의 긴장 완화의 시대가 시작했다. 그 후, 두 강대국이 SALT I(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을 체결 전략 무기 제한 협정과 다른 쌍무 협정을 함.
미 - 소 긴장 완화,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소련의 팽창론자와 강경정치는 Angola와 Ethiopia에의 군사적 개입, 아프가니스탄의 침공, 폴란드에서의 계엄령 집행 기관, 중앙 아메리카 및 카리브에 혁명 운동의 지원, 그리고 유럽과 극동에서의 군사력 증강은 미국으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사이 마침내 반소련 연합체로 이끌었다. 따라서, "작은 냉전"은 1980년 시작되었고, 고르바쵸프는 소련의 리더가 되었다. 그리고 주로 소련의 정책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중동과의 관계는 매우 향상되었다. 소련은 동유럽 전역을 제어할 수 없었게 되었다(1989-1990). 그리고, 1991년 12월 자체적으로 파괴되었다. 따라서 2 차 세계 대전 기간 이후의 특징 양극, 냉전 체제를 결말.
C. 냉전의 끝
냉전은 1989 년에 때 소련이 서독과 동독의 통합을 허용하였을 때 끝이 나게된다. 왜 냉전이 끝난 것일까? 네가지 요인이 냉전의 붕괴에 대해 가져왔다. 첫째, 소련의 확장주의에 대한 봉쇄 정책이 효과적이었다. 국무부의 정책 기획 직원 회장 조지 캐넌은 , 억제하는 정책을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주창. 미국은 이후에 봉쇄 정책은 세계 대전 이후 기간 동안 미국의 정책의 특징이 되었다. 즉, 봉쇄 정책 (또는 군사적 수단으로 소련의 위협을 포함하는)은 미국 외교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Kennan는 소련이 확장 발전론 미국 국가 안보에 직접 협박 초래할 교전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긴 기간, 참을성 있게, 하지만 회사 및 러시아어로 광대한 경향의 경계 봉쇄."를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만약 소련 체제 자체 파괴의 "씨앗"을 포함하기 때문에 소련의 확장주의가 포함된 될 경우 소련 권력 또한 마찬가지로 "붕괴" 또는 점차적으로 "소멸"될 것을 예측했다. 즉, Kennan 정확하게는 소련의 내부 문제 (공산당의 독재, 결함이 있는 경제 시스템, 대중의지지 등 부족)가 소련의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1991년 12월 소련의 내부 붕괴가 Kennan의 봉쇄 정책을 입증했다.
[조지 Kennan : 봉쇄 정책의 아키텍트]
둘째, 1970년대에 소련의 확장주의가 소련의 경제에 거대한 부담에 위치해 있고, 미국으로부터의 혹독한 반응을 가져올 제국의 과다팽창을 초래했다. 소련은 제국이었고, 황제의 권력으로써 원조(재료등..)가 수많은 공산주의의 국가와 공산주의서 움직임으로 제공되었다. 이것을 하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었고, 이것은 소련과 큰 경제적 부담을 야기했고, 소련의 붕괴를 가능케 했다.
셋째, 1980년대 소련을 항복시킨 미국의 군사력 증강.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크게 미국 군사 지출을 증가하고 소위 스타워즈 (전략 방위 구상)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소련은 자체적으로 군사 지출을 증가시키고 스타워즈 프로그램을 따라잡을 것을 강요했다. 치열한 군비 경쟁은 소련의 경제적 상황을 더욱 악화하였고, 군사적인 문제 협상해결책을 찾던 소련의 지도자를 압력 하였다.
넷째, 고르바쵸프의 페레스 트로이카(구조 조정)가 국제 무대 가정과 신사고에서 소련에 대한 시스템의 파열을 촉진.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지도자, 고르바쵸프는 개혁을 도입하여 소련 체제를 개선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개혁은 소련과 국내외 내부 통제 불가능한 변화 움직임에 설정 개혁과 변화는 통제되었고 결국 1991년 12월 소련의 폭발.
[Mikhail Gorbachev]
Lesson 19 : 테러 시스템 (1945에서 1991 사이) (3 / 3)의 균형
Readings : MINGST, 38-49. (review)
수업 개요
이 강의에서는, 우리는 핵무기와 핵 전략을 다룰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핵무기의 고유한 기능을 설명한다. 둘째, 우리는 이후 2 차 세계 대전 시대에서 핵 전략을 검토한다.
수업 목표
이 강의를 완료하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핵무기의 본질을 이해하며,
* 핵 전략의 다양한 이해.
연구 노트
A. 핵무기
핵무기는 국제 시스템에 완전히 새로운 측면을 소개했다. 첫째, 핵무기는 엄청나게 파괴적이다. 그러나 그 놀라운 파괴 용량 때문에 핵무기는 사용할 수 없다. 핵무기는 최고의 전쟁에 대한 억지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 그것은 상호 자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기들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 보다는 사용하겠다는 위협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둘째, 긴 범위의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포함한 정밀한 전달 혹은 수송체제의 발전은 주들을 대단히 파괴적인 핵무기에 과도하게 취약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더 이상 꿰뚫을 수 없다. 파괴적인 용량과 핵 미사일의 범위는 영토 국가 전체 파멸을 열었다.
Grolier의 새로운 핵무기에 관한 책의 지식
핵 억지력은 효과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와 "아니오"가 있다. 억지 전략은 전면적인 핵전쟁을 예방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난 여러분들에게 2차 세계 대전 이래로 핵전쟁이 없었다고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 반면에, 억지력은 지역적인 전쟁, 대리전쟁, 게릴라전 등을 예방하는 데에는 극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소규모 또는 비정규 전쟁들은 종종 한국전쟁과 쿠바 미사일 위기같은 미국과 소련이 관련된 위기와 갈등을 야기시켰다.
2 차 세계 대전 이래로 핵무기의 소지가 국가의 지위를 결정하게 되었다. 핵무장 국가들은 강대국으로 간주되어진다. 반면, 비핵 상태 국가들은 국가들 사이에서 second-class 시민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많은 국가들이 핵무기 제조과정의 발전으로 분투해왔다. 현재 약 20개 국가들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캐나다, 일본, 독일, 스웨덴, 이집트,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아프리카,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 국가의 범주에 속한다.
글로벌 군사 지출은 매년 1980 년대 후반부터 일조 달러를 초과했다. 그리고 그것은 냉전이 끝난 후에 약간 감소했다. 어느 나라가 가장 군사지출이 클까? 물론, 큰 힘이 가장 군비 지출을 하겠지만, 일부의 개발도상국들이 빠른 속도로 그들의 국방 지출이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군사 지출은 국민 총생산의 약 1 %이다. 언뜻 그것은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일본은 두 번째로 큰 경제를 가진 나라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세계에서 3 번째로 큰 방위 지출이다. 일본의 경우, 우리는 쉽게 국내총생산의 비율로 나타낸 군사지출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군사지출의 레벨을 결정짓기 위해 군사목적으로 지출하고 있는 실제금액 양을 보아야한다. 최근 몇 년동안, 동아시아에서는 지역 군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태국, 한국, 일본은 그들의 군사지출을 빠른속도로 증가시키고 있다).
B. 선제 공격과 예방 공격
우리는 "선제 공격"과 "예방 공격"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선제 공격의 전형적인 예는 1967 년 이스라엘의 공격이다. 만약 영토와 정치적 주권에 명백한 위협이 될 경우, 지금이 아니면 행동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며 위협이 임박할 때에 행하는 공격이 선제 공격이다. 다르게 말하면 B라는 나라가 A라는 나라에게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을 때 A는 B를 선제 공격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A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막대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예방 전쟁은 정치가가 단지 나중에 전쟁하는 것보다 지금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 알다시피 1914 년 독일 장군의 생각에 의한 일어난 전쟁이 예방 전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1916까지 기다리면 러시아는가 너무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로 Schlieffen 계획을 실행했다. 즉, 예방 공격은 적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행된다.
C. 1차공격능력과 2차공격능력
냉전 동안 미국-소련의 관계가 안정되었다. 이것은 다른 한쪽이 "일차공격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때문 이었다. 1차공격능력은 "한 번의 공격으로 2차공격능력을 파괴하고 오로지 작은 보복만을 받겠다는 의미다.
효과적인 전쟁억지력은 2차공격능력이 필요하다. 잠재적인 공격자는 아마 상대의 보복 공격 시설에 갑작스런 핵 공격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지도 모른다. 만약 갑작스런 핵 공격으로 상대의 핵 보복 공격을 없앨 수 있다면 상대국의 핵 억지력은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억제 효과는 총 파괴적인 능력이 아니라 기습 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 능력을 말한다. A 국가가 적의 기습 공격 (최초 공격 용량)과 감당할 수 없는 데미지를 적에게 가할 수 있는 핵무기 시스템을 보유하는 경우, 우리는 그 국가가 2차공격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차공격능력과 2차공격능력을 설명하겠다. 길거리에서 두 사람(A, B)이 싸우고 있다고 하자. A가 B에게 한방도 맞지 않고 B를 완전히 한방에 쓰러뜨렸다면, 우리는 A가 일차공격능력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A가 B의 얼굴을 때렸으나 B는 A에게 심각한 데미지를 줄 수 있도록 남아있다면, 우리는 B가 2차공격능력을 가졌고 A는 일차공격능력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2차공격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많은양의 핵무기와 배달 차량, 권력의 분산, 보복적인 무기의 “경화”, 보복적인 원인들을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최대한 떨어뜨림, 보복적인 무기들의 은폐, ‘경보접수즉시발사’정책, 모바일 핵력 과 같은 보복적인 핵 보유력 을 예방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현재 취약성을 줄이는[2차공격능력을 향상]시키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은 이동성이다. 특히, 잠수함탑재탄도미사일 (SLBMs)은 매우 이동성이 좋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인 억지력의 요소이다.
SLBM: Delta IV class (Rus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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